도형으로 풀어낸 상상력의 세계

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12 - 차영경

by 행복한독서


작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꽃들에게 희망을』과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고 어린 마음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이웃에 살았던 이모들의 도움으로 어느 결에 한글을 깨우쳤는지 책이라는 볼거리에 빠졌었다. 집에 있는 아이의 그 책을 다시 보니 왜 그런 책이 끊임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어떤 책은 누군가에게 평생 남아있는 유산일 수도 있다. 그리고 기억 속의 그 유산은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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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책에서는 다른 그림책들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모든 이야기와 이미지가 점, 선, 면으로 도형화되는 듯, 그러면서 입체감을 느끼는 실체를 본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그림책에 이런 조형성을 갖춘 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작품 세계 못지않게 그림책 세계로 들어오기까지 작가가 거쳐 온 시간과 이야기가 남다를 것 같았다. 낙천성과 유쾌함은 이 작가의 재능에 하나 더 추가되는 부분처럼 보인다. 언제 봐도 그의 말과 표정에서는 걱정과 슬픔을 느낄 수 없을 것처럼 유머가 넘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미적분을 재미있게 공부했다는 그가 처음 전공해서 공부한 분야가 통계학이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었다. 수학과보다 통계 쪽에 더 끌렸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이후 행로가 더 궁금해진다. 편견이겠지만 보통은 이공계와 인문계. 예술 분야는 철저하게 다른 사고와 다른 길을 가야 할 것처럼 우리는 오랫동안 세뇌되어왔기 때문이다.


화실 다닐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던 그에게 그림은 늘 마음 안에 들어있었다. 대학 진학 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그가 미술 쪽과 그나마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의류학과를 가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 학과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한번 선택한 일은 가능하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간다. 지금도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지만 차선으로 선택한 통계학과도 끝까지 잘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관심은 또 다른 쪽에 가있었다. 학교를 다니며 당시 한창 보급되고 있던 디자이너의 필수 도구 매킨토시 과정을 배웠다. 이것만 배우면 디자인 과정으로 입문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매킨토시 과정을 마친 후 직업인으로 일하려고 졸업하기 전에 20년 살았던 부산을 떠났다. 본격 편집디자이너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가 일하던 광고 대행사는 특정 전문 분야의 출판물을 제작하는 곳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그 흔하던 야근이 없었다. 이 좋은 여건에서 공부하기 위해 서울산업대학교 시각디자인 과정 3학년에 편입학을 했다. 당시 이 회사 대표의 배려가 큰 힘이 되었다.


이곳을 졸업한 뒤 다시 광고디자인 회사 생활을 하다가 이번에는 정말 가고 싶어 했던 곳으로 편입학한 곳이 홍익대 회화과였다. 그림을 향한 열망에 한발 다가서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같은 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을 전공하기 위해 계속 공부의 길을 택하였다. 도합 10년을 공부한 셈이다. 그것도 직장 생활과 디자인 관련 아르바이트를 쉼 없이 하면서 객지에서 6년간 학교를 다녔으니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을 터였다. 뒤늦게 회화과를 선택했지만 이때가 가장 힘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행복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거였다. 선택한 길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셈이다.


직장인으로 다녔던 마지막 회사가 지금의 그림책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림책을 편집·디자인하는 일터에서 작가들과 함께 워크숍 하듯이 교류하며 익숙하게 다가갔다. 그림책을 기획, 편집해서 납품하는 일은 고강도 트레이닝처럼 힘들었지만 결국 그를 독립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남의 작품을 만드는 손이 이제 자신의 작품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절박함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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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과정은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기에 각각 방향성이 다른 두 군데의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서서히 기량의 폭을 넓혀나갔다. 기본 도형으로 만들어가는 독특한 작업은 이제 그만의 조형 세계가 되었다. 어떤 이야기나 주제도 일단 그의 손을 거치면 선과 면으로 바뀌어 전혀 다른 모양으로 탈바꿈해버린다.


첫 번째 그림책 『네모』는 마치 3D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면 ‘네모’라는 글자 형상이 드러나는 입체도형이다. 사각형 입체의 숲에서 네모 글자체가 떨어져 나오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바뀌는 여행을 한다. 뭉치기도 하고 찬란한 색채로 날아오르는 모습, 그러다 뾰족한 무언가에 찔리기도 하지만 다시 날아올라서 마치 불꽃놀이의 폭죽처럼 사방으로 터지는 장면이 끝나는가 싶더니 동그라미 형상으로 변한다. 마지막 짧은 문장은 이 그림책이 선물하는 잠언 같은 말이다.

“동그라미가 되어도 나는 나니까.”

이 한마디에 눈이 멈춘다. 작가의 살아온 이야기를 도형으로 추상화한 작품으로 보이는 이 그림책에서 특유의 긍정의 힘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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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를 그의 시각 구성으로 다시 풀어낸 『아주아주 멋진 하얀 공주』, 표지와 본문을 트레이싱지로 작업하느라 제작 과정이 까다로웠던 『빗물 아파트』, ‘마음먹다’라는 동사를 음식과 비유하며 교묘하게 요리해내는 『마음먹기』는 이 작가의 이미지 구사 방식이 어느 정도로 탄탄한지를 완성도 있게 드러내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수많은 조각으로 퍼즐 맞추듯이 가면서도 어떤 모양으로 완성이 될지 자신도 모르는 수수께끼 같은 미지의 탐험. 그의 작업은 쉴 틈 없이 걸어왔지만 결국 시작은 벌써 40년 전쯤 이미 어린 시절에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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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요하다면 또 무언가를 벌이고 할 것 같은 사람. 이제 독보적인 그만의 작업이 세상에 한 권 한 권 나올 때마다 상상 이상의 공간을 기대하게 된다. 이미 지면이 아닌 실제 전시 공간에서 입증된 바 있다. 골판지 상자를 이용하여 수십 배의 스케일로 키워서 커다란 조형물로 ‘네모’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곧 출간되는 『미로나라』는 임금님이 전혀 색다른 캐릭터로 나선다. 또 예측할 수 없는 뭔가를 우리에게 안길 것 같다. 그래도 될 만큼 충분히 깨웠다. 깊이 잠들어있던 상상력을.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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