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13 - 이지은
이번 겨울 들어 가장 많은 눈 예보가 있던 날. 작가의 집에서 내려다본 야산 풍경은 보이는 모든 것이 희뿌옇게 어둠처럼 내리깔리고 있었다. 날씨 탓에 옛이야기 들려주기도 좋은 시간이었다. 작가에게 곧바로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를 물었는데 뜻밖에도 한 곳에서 27년 동안 살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무렵 서울의 동네들은 한적한 분위기와 함께 소박한 모습들을 지니고 있었다. 종을 딸랑거리며 지나가는 두부 장수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집에 대해서 들려줄 때, 줄곧 많은 부분이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었다.
어쩌면 『팥빙수의 전설』 『할머니 엄마』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던 캐릭터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성년이 되기까지 지냈던 집에 대한 기억도 특별한 장소의 하나였다. 혼자 숨어있기에 아주 좋은 특이한 공간 구조는 설명을 위해 그림을 그려주었을 때 더 실감 나는 흥미로운 곳이었다. 노란색 종이 장판이 깔린 방 안에서 창밖을 보면 감나무가 보였다. 오후의 햇살이 안으로 들어오면 방바닥이 누렇게 빛이 나는 아늑함이 있던 곳, 그곳에서 평화롭고 재미있는 놀이동산을 만들어보고 싶은 꿈을 품었었다.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면 1층의 거실을 중심으로 나선형처럼 2층으로 올라가 여러 개의 방이 이어졌다. 2층 천정에서 1층에까지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는 그 집에 이사 오기 전부터 있던 거여서 아주 오랫동안 그냥 집의 붙박이처럼 보였다고 했다. 누군가 살았을 것 같은 비밀스러운 지하층 구조도 정확하게 그림으로 그려주었다.
여기에서 외할머니는 거의 집안의 기둥처럼 종횡무진 활약을 하셨다. 부모님이 모두 바깥일 하는 중에 할머니는 일하는 사람들 먹을거리며 집안일을 도맡아 하시며 손녀의 부모 노릇까지 해내셨다. 손녀에게도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이해와 더불어 관심을 많이 주셨던 분이었다. 그때도 여성이면 당연시했던 집안의 가사일을 빠짐없이 해내셨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지켜본 할머니는 세상에 대해 다 풀어놓지 못한 에너지가 감춰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할머니가 단지 여성이라는 옛 관습의 질곡에 갇혀 지냈던 점이 무척 아쉬웠다.
작가는 『할머니 엄마』에서 마치 할머니에 헌정하는 작품처럼 간결하지만 그런 내면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냈다. 부모님 대신 운동회에 함께 가주셨고 달리기에도 함께했으나 도중에 넘어져 손녀에게 실망을 안겨준 할머니. 운동회가 끝난 뒤 길거리에서 손녀와 함께 크로켓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 몇 마디가 그림책에서 보기 드문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넘어 이제 구순이 되신 어른에 대해 깊은 사유를 담아 옮겼다. 이 그림책에서 작가는 상황 묘사에 아낌없이 능력을 발휘한다. 엄마가 일하러 나갈 때 울고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할머니의 혼잣말과 함께 방 창문에 액자처럼 표현된 그림은 그의 구성력이 얼마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달리기 시합에서 출발선에 나란히 손녀와 함께 한쪽 무릎을 땅에 딛고 대기하는 표정, 선이 그어진 운동장 트랙이 수직으로 보이는 장면은 비장함과 위트가 동시에 평면과 입체감으로 나타나서 보는 사람을 강하게 끌어들인다. 한편으로 희화적이지만 구석구석 빠짐없이 이야기의 요소가 꽉 차 있다는 느낌을 마지막까지 본다.
작은 평면에서 어떤 때는 여백을 크게 잡고 어떤 장면은 반반씩 나누어 면을 활용하기도 하고, 달리기하는 운동장은 펼친 면을 모두 사용하면서 할머니와 손녀가 뛰는 장면만 둥근 타원으로 처리하여 스케일을 크게 활용한다. 드러나는 감정도 아주 섬세하게 가는 선과 색연필의 질감, 또는 다른 재료로 채색하여 모든 장면이 독자에게는 마치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철저하게 객관화하여 냉정함을 유지한다. 작가의 가장 큰 강점은 이처럼 평상심을 유지한 채로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보여주는 것이다.
2012년경 그림책을 위한 본격적인 공부를 할 때 처음 맞닥뜨리고 시도했던 주제가 ‘서사’였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십여 년 이상 생활한 뒤 작가 자신의 ‘정체성 찾기’ 고민을 할 때 특히 그랬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못지않게 함께 가는 것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팥빙수의 전설』과 『이파라파냐무냐무』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치 신동엽 시인의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떠올리게 한다. 시 작품에서 문명 이전의 자연과 그 이후를 땅을 갈아엎는 쟁기꾼의 입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면, 작가의 그림책에서는 원시성을 두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옛이야기와 문명을 자연스럽게 갈아엎고 버무린 이야기가 『팥빙수의 전설』이라면 인간 사회가 배제된 문명 이전의 전혀 다른 세계, 마시멜롱의 마을을 등장시켜 완벽하게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그려낸 작품이 『이파라파냐무냐무』이다. 그림책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사람, 그리고 그 물음에 다가서려는 일을 그가 하고 있다. 위의 세 작품 모두 공통점은 없다. 그만큼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정서적으로 약해지고 무척 힘들어했을 때 굳이 논리를 앞세워 설명하지 않고 붙들어 매준 사람이 있다.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한 사람, 그는 함께 사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방향성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굳이 남을 판단하지 않으며 인생은 저마다 각자의 길로 사는 것, 개의치 않고 내 일을 사랑하는 사람. 사람이 굳건한 나무처럼 건강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보았다. 또 한 분, 아흔이 훨씬 지난 할머니는 지금도 손녀가 하는 일 특히 창조적 활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 더 힘을 얻는다. 여기에 더하여 글과 그림이 완벽하게 조화로운 작품 세계가 점점 빛을 발한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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