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아이콘이 된 검정말 토토

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15 - 조은영

by 행복한독서

사람의 일이란 모를 일이다. 처음엔 의과대에 지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점점 학년이 갈수록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미대 시각디자인과를 택하였다. 한편으로 본능적인 운동감각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내내 운동에 자신이 있어서 체육 시간에 시범이 필요하면 선생님은 그를 불러 마치 숙련된 조교처럼 동작을 보이게 했다. 멀리뛰기, 공 던지기, 핸드볼, 뭐든 잘했는데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도 부모님께 운동시키라는 뜻밖의 요청을 하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그가 예체능계로 진학할 거라고 얘기하면 당연히 체육과로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고 미술 실기대회에서 상을 받는 일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림이라는 분야에서 평생의 업으로 살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성격이 낙천적으로 보여서인지 그가 고민하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밝은 성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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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에게 그림책은 우연처럼 다가왔다. 대학에서 2~3년 지내다 보니 졸업 뒤의 앞날이 훤히 보였다. 특히 디자인 쪽은 직장 생활하다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 뒤 몸이 망가져 나오거나 결혼해서 나오는 것 둘 중 하나. 둘 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휴학하고 신문사 문화센터 그림책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평소 일러스트지나 영화 매거진 등을 보며 글과 그림을 함께하는 작업이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보였었다. 이 센터 아카데미에서 강의와 함께 끝난 후 선배들과 어울려 지내는 일이 오히려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밤늦게까지 지내는 일이 늘어났다. 그래도 새벽 5시 안에는 반드시 집에 귀가하는 것이 부모님과의 약속이었다. 지나친 간섭도 무관심도 아닌 적당한 거리감이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정신없이 1년 반 정도를 지내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생애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결과물을 서서히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 올리듯 길러냈다. 졸업 과제가 문제였다. 어린이 그림책과 어른 그림책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하다가 어른 그림책에서도 새로운 주제를 찾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그는 국어사전을 뒤적이다 ‘경마’라는 단어에 눈이 멈췄다. 경마장을 주제로 다큐를 준비했고 아쉽게도 미완성으로 남았다. 2006년쯤에는 작가들이 함께 어울려 공동작업실을 마련했고 여기서 고된 노동을 했다. 시리즈물, 중학 수학 문제집. 학습지 등 연락해온 곳의 일은 거의 모두 해냈다. 시리즈물의 작업 과정은 글작가와 함께하는 일이어서 더 힘들었다. 그림 그리는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나이와 경력, 다른 여러 가지 점이 겹쳐서 불평등하게 대우받는 것처럼 보여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서 명예와 지위, 금전적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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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그림책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관련 학과가 개설된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여기에는 중견 그림책작가, 편집자 등이 포진하고 있어서 다시 한번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예전에 힐스 졸업 작품으로 묵혀놓았던 경마장을 다시 시작했다. 이것만 하고 그만두겠다는 절박한 생각을 하며 전념했다. 아예 몰입하기 위해 과천 경마장을 자주 드나들면서 속속들이 취재하고 말과 사람들을 알아갔다. 이미 문화센터 사진 강좌에서 경마장을 일행들과 함께 출사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또 달랐다.


경마장은 분명 야외였는데 뿌옇게 흐린 모습이 마치 실내로 착각할 정도였고 잠시 뒤에 그것이 담배 연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여자 혼자서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촬영을 하는 모습을 누군가 주시를 했던 모양이다. 좋지 않은 결과에 화풀이 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런 뒤에는 300밀리미터 망원렌즈를 구해서 멀리서 피사체를 잡아냈다. 특히 경마 경기 중 말들이 반환점을 돌고 결승점을 통과한 뒤 사람들은 순위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가 된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트랙 바로 앞에서 포착한다. 이때 흥분한 사람들은 특이한 경주마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성과 욕설이 뒤엉키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진다.


일요일 아침, 할아버지가 나를 경마장에 데리고 갔다.

“오늘 진짜 말을 볼 수 있어?”

“그럼, 볼 수 있지.”


이렇게 시작하는 『달려 토토』는 자신이 좋아하는 말 인형 ‘토토’와 닮은 진짜 말을 보기 위해 할아버지와 경마장을 매주 가면서 어린 손녀의 눈으로 말과 사람들을 응시하는 어른과 어린이의 경계 없는 그림책으로 탄생했다.

-달려토토-경마.jpg <ⓒ보림(『달려 토토』)>


인쇄된 그림책에서는 구분이 잘 안 되는 그림 묘사의 표현 방식도 할아버지와 손녀를 비롯한 인물 스케치는 대부분 건식 재료를, 많은 사람과 함께 할아버지의 확대된 이미지 등은 먹을 사용한 습식 재료, 디테일이 아닌 원경에서의 인물 등은 스크래치, 역동적인 경주마들의 질주 장면 등은 불투명 채색 기법으로 더욱 강렬한 움직임을 색채로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수없이 많은 사진 촬영과 스케치, 채색, 드로잉 작업 등이 걸러져서 펼친 면 스무 바닥으로 나와 2009년 처음 볼로냐 국제아동도서박람회에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선을 보였다.


여기에서 프랑스 메모출판사가 한국을 제외한 세계 판권을 계약했고 이듬해 2010년 프랑스판이 나왔다. 2011년에는 브라티슬라바 국제그림책원화전(BIB)에서 그랑프리상을, 2012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연감 표지 이미지 선정, 2013년 볼로냐 메인 전시장 특별전 초대로 이어지면서 『달려 토토』의 검정 색채의 말은 작가의 아이콘이 되었다. 또 새로운 작업은 어떤 뜻밖의 이야기가 나올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것 역시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서울도서전 전시에 이어 판교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열리는 바캉스 시즌3(동인그룹) 전시회가 첫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그는 항상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앞으로의 작업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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