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깊이읽기
그림책을 구성하는 작은 단위 요소 중 하나는 활자와 이미지이다. 활자들이 모여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들고 이야기를 만든다. 이미지도 형태와 색 그리고 질감 같은 세부 요소와 함께 어떤 하나의 캐릭터와 배경 그리고 상징과 감성을 만들어낸다.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은 서로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안적인 관계가 형성될 때 좋은 작품이 완성되고 독자들에게 더 많은 메시지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좋은 그림책은 작가가 어떻게 이 둘의 관계를 서로 조화롭게 만들어내는가에 있는데, 이 중 글 뭉치의 배치를 그림과 잘 어울리게 하는 것이 중요한 디자인 요소 중 하나이다. 시각적으로 내용에 맞게 서체를 선택하고 크기, 자간, 공간 등을 배열하는 디자인을 전문용어로 타이포그래피라고 한다. 보통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편집디자이너가 책 전체의 제작 요소와 레이아웃, 인쇄 등을 고려해 가장 좋은 디자인이 되도록 고민한다. 또한 작가나 독자의 입장에서도 타이포그래피는 그림책에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중요 창작 요소이다.
그림책은 다른 인쇄 매체와 달리 서체 선택이 많거나 배치 구성이 세밀화되어 있지 않다. 표지의 제목 서체나 그림문자 그리고 본문 서체 등 크게 서너 가지 정도의 서체 선택과 배열이 잡히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몇 가지 선택에 따라 그림책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지고 의도했던 메시지 전달이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작가나 편집자는 주의해야 한다. 가끔 작가가 그림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글 자리를 놓치거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 배치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글과 그림의 어울림은 독자가 크게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어색할 경우 눈에 거슬리거나 흐름을 끊게 되어 작품 읽기나 몰입에 방해되기 쉽다. 이런 이유로 그림책에서 타이포그래피는 윤활유 같은 중요한 요소이다.
최근 서체를 만들기 쉬운 환경이 되면서 한글 서체도 종류가 많아졌다. 즉 인쇄와 온라인 매체의 서체 구분이 점점 사라지고 젊은 감각과 독특한 느낌의 서체를 많이 볼 수 있다. 서체에도 각각의 목소리와 느낌이 있다. 예전에는 그림책작가들이 다양한 서체를 많이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목은 그림글자의 형식으로 직접 그리는 경우도 있었고 본문의 경우 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의뢰할 때도 있었다. 그림책 출판에서 서체의 선택과 제안은 작가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작품의 분위기와 독자의 감상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에 출판될 때까지 세심하게 봐야 한다.
노인경의 『책청소부 소소』(문학동네)를 보면 책 속에 여러 목소리의 활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다양한 느낌의 활자들을 그림 형식으로 바꾸어 잘 표현하고 있으며, 주인공 소소와 그들의 관계를 보면 하나의 생명력 있는 캐릭터로서 글자체들을 표현한다.
우리가 그림책 속에 글을 읽을 때, 의미를 파악하고 그림과 교차하면서 읽기에 바쁘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활자의 형태나 크기, 배치에 따라 약간의 다른 느낌으로 전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우리는 이런 글자의 형태와 표현에 따라 활자가 가진 의미와 더불어 어떤 복합적인 느낌과 감상 등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각각의 그림책이 가진 중요한 감성이다.
김세현의 『준치 가시』(백석 글 / 창비)와 『꽃그늘 환한 물』(정채봉 글 / 길벗어린이) 제목에서 오는 묵직한 먹선과 표현은 더욱더 한국적인 정서를 느끼게 한다. 내지에 쓰인 목판 느낌의 서체와 전각은 작가의 한국화와 어우러져 작품의 한국적인 정서와 감성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낸다.
보통 붓, 펜 등을 이용해 단어나 문장을 하나의 고유 이미지로 표현하는 형식을 캘리그래피라고 한다. 서양과 한국이 말하는 캘리그래피는 약간 의미가 다른데, 이것은 글을 쓰는 도구가 다르고 한국에서의 캘리그래피를 포함한 서예는 서예가마다 다른 경지까지 갈 수 있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도 세분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전래 그림책에서는 서예를 응용한 캘리그래피 제목을 많이 볼 수 있다. 캘리그래피의 표현 또한 하나의 고유한 예술 영역이라 서예가를 통해 그림책 작품과 잘 어울리게 구성하기는 쉽지 않다.
그림책을 읽다 보면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읽히기도 하지만 글 자체의 형태와 크기, 강조 등 다양한 변형을 통해 글의 원래 의미를 증폭시키거나 독자가 그 의미를 알아채고 감상이 극대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글이 가진 기호적인 형태를 이미지화해서 독자에게 의미와 함께 어떤 감성 또는 감정 등을 전달하는 그림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기호적인 문자에서 이미지 문자의 경계가 불분명하더라도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채고 전체 이야기에 더 빠져든다. 예를 들어 숀 탠의 『도착』(사계절)이나 이지현의 『문』(이야기꽃)을 보면 이상한 외계 문자가 등장한다. 그것은 그림책 속에서 표현된 전혀 다른 세상의 문자이지만 독자는 대략적인 그림 정황으로 그 문자의 표현을 추측하거나 임의로 어떤 문장을 상상해내기도 한다. 이런 작품에서의 문자 표현은 기호나 의미라기보다는 어떤 상황이나 표현의 요소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작은 단서라도 독자는 그 의미를 기호로 느끼고 해석하려고 하면서 더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작가의 경우 이런 그림 텍스트를 잘 활용한다면 글의 의미와 의도한 메시지를 잘 표현할 수 있다. 반대로 이것을 너무 과하게 하거나 남용해서 쓰면 전체 이야기나 주요 그림과 잘 어울리지 않거나 오히려 방해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첫 책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으로 많이 보게 되는 한글 그림책은 문자로 그림과 언어를 같이 표현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 그림책에서도 알파벳을 많이 보게 되는데 단지 문자 교육이나 의미만을 전달하기보다는 문자가 연결되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캐릭터와 사물 등을 통해 문자와 이미지가 아이에게 기억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생각하는 ㄱㄴㄷ』(논장), 이수지의 『움직이는 ㄱㄴㄷ』(길벗어린이)은 다양한 문자의 형태와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결합하고 있다.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의 역할이 규정되지 않고 때로는 서로 역할을 바꾸어낸다. 이런 것과 달리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품들도 있다. B.J. 노박의 『그림 없는 책』(시공주니어)은 역설적이게도 그림이 없는 그림책이다. 글의 형태와 색으로 독자에게 내용을 상상하게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있다. 이 책에서 약간의 아쉬움은 원작에서 한 가지 서체가 아니라 그림문자 또는 여러 형태의 느낌이 있는 서체와 구성으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독자가 단지 글을 의미만으로 읽는 것이 아닌 형태와 질감, 색, 크기, 공간 등으로 보여줄 때 더 많은 이야기와 상징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의 여러 가지 장점 중 하나는 언어를 넘어 다른 나라의 독자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번역의 양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그림에서 오는 매력으로 언어와 문화를 넘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 번역의 경우 가끔 그림문자 등을 각 언어에 맞게 바꾸어야 할 경우가 있는데 원작자가 그림을 다시 그려주거나 디자이너가 수정하는 등 다양한 경우를 볼 수 있다.
다시마 세이조의 『모기향』(한림출판사)을 보면 원작은 일본어로 표현되어 있지만 번역되면서 그림이 한글로 수정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으로 표현된 한글의 분위기가 원작과 같이 작가의 그림 스타일과 아주 잘 어울려서 독자는 이 그림글자에 전혀 거부감이 없다. 만약 일반 한글 서체나 원어로 표현되었다면 작품 몰입이 어려웠을 것이다.
이수지의 『선』(비룡소)도 각 나라의 언어 표현에 맞게 표지 타이틀이 작업되었다. 작가가 언어마다 다시 그리는 것이 고생스럽지만 최대한 언어에 맞게 의미와 그림이 원작처럼 표현되도록 노력했다. 한태희의 『휘리리후 휘리리후』(웅진주니어)는 문자나 그림을 뒤집어봐도 해석이 될 수 있도록 재미있게 표현했다.
박연철의 『안녕! 외계인』(시공주니어)은 문자를 통해 캐릭터나 그림이 보일 수 있도록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이처럼 단어나 문장은 의미적인 해석과 동시에 형태와 스타일, 질감 등이 포함되고 이야기와 연결되어있다. 이런 작가의 표현과 고민은 문자의 활용과 함께 작품 속에서 잘 표현된다. 즉 우리는 타이포그래피가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창작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책에서 소리나 행동의 문자 표현은 자주 볼 수 있다. 의성어와 의태어 또는 작가가 생각한 독특한 문자 표현은 만화에서 흔히 보는 것과 유사한 경우가 많다. 서현의 『간질간질』(사계절)은 글의 리듬과 소리의 운율이 타이포그래피에 잘 반영되어 그림과 함께 이야기를 잘 끌어가는 중요 요소로 활용된다. 고정순의 『가드를 올리고』(만만한책방)에서 의성어의 질감은 실제 권투선수가 펀치를 맞을 때의 느낌을 소리와 그림, 그리고 무엇보다 질감으로 표현해 이야기를 극대화한다. 독자는 서체 크기와 배치 또한 작품의 중요한 요소임을 각각의 그림책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림책에서 타이포그래피는 그림과 함께 또 다른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중요 요소이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학교나 사회에서 글의 표현 방식을 느끼고 소비했을 것이다. 이것은 문화와 배경지식과도 관련이 있다. 창작자 간에 서로 합의하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통되고 느껴지는 타이포그래피 표현 방식들이 많다. 예를 들어 식당의 간판, TV에서 보는 글자체들, 패션이나 상표 등에서 느껴지는 상징 등 우리 주변에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서체의 이미지는 보이고 소비된다. 그림책 속에도 글자는 다양한 작가의 표현 방법을 통해 창작되고 함축된다. 작가가 글과 그림, 타이포그래피 등 여러 요소를 통제하고 창작해내는 것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어 어떤 메시지나 감성을 전달하게 하는 것이 창작이다. 그만큼 하나하나의 요소와 관계를 고민하고 치밀하고 세심하게 구성해야 한다. 이것은 독자가 작품에 이런 요소들로 하여금 방해받지 않고 작가가 이야기하는 본질에 몰입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림책에서 타이포그래피는 보이지 않게, 티 나지 않게 그림과 작품 속에 잘 녹아져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좋은 타이포그래피이고 좋은 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상현_그림책상상 그림책학교 대표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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