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2
닫힌 생각 속에서 기억 또한 희미해질 즈음,
그제서야 여름의 이야기가 들려와.
잠시 멈추라고 여름은 더웠고,
눈을 살포시 감아 보라고 여름 해는 뜨거웠으며,
들어와 쉬라고 여름 나무는 무성했다는.
여름,
이소영 글·그림 / 46쪽 / 17,000원 / 글로연
‘위로’라는 단어는 그림책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하는 수식어 중 하나다. 이전 작품들 역시 부끄럽지만 이 같은 취지로 기획하고 만들었던 그림책들이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누군가를 위로할 그런 위인이 되지 못한다. 지금껏 작품을 통해 보여왔던 것들은 거칠게 말하자면 자신을 향해 외치고 다짐하고 달래고 토닥거리던 내용으로, 일종의 최면이자 주술 같은 것들이었다. 곧 나를 향한 다짐과 읊조림인 셈이다.
여전히 버거운 현실은 산처럼 무겁고, 막막한 미래는 새처럼 가볍기에, 가진 것과 상관없이 여유를 누릴 수 있고 흔들리는 바람 위에서도 불안해하지 않을 방법을 터득하고자 노력하지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여름,』 역시 그런 과정에서 탄생했다.
내가 사는 작은 아파트 옆에 제법 넓고 운치 있는 공원이 있다. 단조로운 일상의 커다란 일부가 되어버린 이 공원은 어느덧 내가 세상을 보는 안경이자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거울과 같았다. 하늘과 구름, 나무와 사람, 물고기와 갈매기가 공존하는 그곳에서 머물러 있는 것과 흘러가는 것, 지난 것들과 다가올 것들이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은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여름,』은 수백 년을 살아온 나무들과 그 아래에서 휴식하는 사람들의 느린 호흡, 뙤약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노는 아이들과 훌훌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여인의 모습들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되었다. 이런 공원의 모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픈 간절함으로 내가 본 풍경의 조각들을 노트에 휘갈기듯이 그렸고, 그중 하나를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렸다. 그리고 ‘여름’에 대한 문장 세 줄만 덧붙였다.
나의 잡념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음 터놓고 함께 이야기할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잠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절박함을 담아서.
내 간절함이 닿았을까? 글로연 편집장님이 그 게시물을 보고 글의 느낌이 좋으니 이런 톤으로 여름에 대한 그림책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나의 첫 번째 그림책을 함께해주신 분이었고 그 이후에도 작품에 대한 다양한 조언과 애정 충만한 관심을 보여주셨기에 망설임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반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글솜씨가 좋지 않았기에 여름이라는 계절에 대한 몇 가지 단상만을 끄적거린 채 세 계절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다시금 거울을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여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불안과 초조 혹은 막막함 속에서 사실 웃고 즐길 수 있는 일상과 일 그리고 친구나 가족이 있다는 순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그 순간들이 바로 내가 공원에서 보고 느끼고 그렸던 여름의 풍경이었고 내가 쓴 문장 속에 담긴 실 가닥 같은 메아리였다.
그러나 소재가 소재인지라 『여름,』은 그림에 더 집중해야 했다. 여러 재료를 시도해가면서 재미와 친근감을 줄 수 있는 기법을 찾아 나갔다. 하지만 더미를 여러 번 고치면서도 마지막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는 ‘재미’였다. 서사 구조가 분명한 이야기도 아니고 주인공 없이 여름의 단편적인 풍경과 인상만을 나열하다 보니 나타나는 난관이었다.
그래서 빨간 ‘여름이’를 만들었고 파란 여성을 보조 캐릭터로 삼았다. 마지막 복숭아 속 여름이로 가기까지 여름이의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그리고 최대한 귀엽게 만들기 위해 배밀이하던 두 아들의 아기 시절 사진을 참고하기도 했다.
3월 중순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여러 일정이 빠듯한 이 시기에 코로나19로 봉쇄 조치가 내려졌다.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도 폐쇄되었고 공원도 문을 닫았다. 경험해보지 못한 변화였다.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작업은 이어졌다. 그 와중에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던 생각이 있었다. ‘당연한 것들이 이토록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니.’
그러나 하루하루 달라지는 대기의 깨끗함, 적막함마저 들게 하는 조용함은 오염과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도시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강요된 멈춤이지만 그 멈춤 속에서 우리는 의도치 않은 새로운 모습을 마주했다. 그것은 지금껏 우리가 지나치게 서두르며 한쪽만을 바라보고 달려왔으며, 이는 어쩌면 우리의 오만함이 아니었을까.
봉쇄 조치가 끝나갈 무렵 『여름,』의 작업은 완료되었고, 비록 내용의 큰 변화는 없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름’ 뒤의 쉼표를 탄생시켜준 디자이너와 편집장님이 무척 고맙다.
이소영 작가는 한국과 프랑스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한 후, 그림책작가가 되었습니다. 쓰고 그린 그림책으로 『그림자 너머』와 『파란 아이 이안』 『굴뚝귀신』 『바람』 『Ici, ensemble et maintenant』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삶과 삶 속에서 느끼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책에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