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3
시저는 아무도 넘보지 못하도록
둥지 주변을 막았어.
그리고 부리나케 늪으로 향했지.
큰 입을 벌려 물을 들이키고, 정말 오랜만에
물고기로 허겁지겁 배를 채웠어.
그러고는지렁이, 벌레들을 잔뜩 물어 와
새끼 새들에게 먹였어.
시저의 규칙
유준재 글·그림 / 52쪽 / 13,000원 / 그림책공작소
악어는 참 무섭게 생긴 동물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실제로 동물원에서 보거나 다큐멘터리에서 보면 무섭고 거칠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파충류라면 질색하는 저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림 소재로 악어를 참 많이 사용했습니다. 거친 질감의 등딱지, 길쭉하게 삐쭉 튀어나온 이빨투성이 입, 그림 그리기에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작 『균형』 그림책 작업을 끝내고, 다음 그림책엔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 하던 차에 ‘규칙’이란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늪에 사는 무소불위의 커다란 악어 한 마리가 떠올랐고, 규칙이란 키워드가 합쳐지면서 ‘시저의 규칙’이라는 합성 문장이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창작 작업이 언제나 그러하듯 처음부터 이야기가 술술 풀리지는 않았고, 제목만 그럴싸하게 정해놓았을 무렵, 어느 날 우리 집 저녁 식탁의 에피소드가 이 이야기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 집 식탁엔 돌아가신 아버님이 물려주신 클래식하고 멋진 오래된 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의자의 이름이 제가 멋대로 정한 ‘가장의 의자’였고, 가족 누구도 그 의자에 앉을 수 없다는 규칙을 정해놓았습니다. 아마도 힘없는 가장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들 나와서 저녁 먹어”라는 소리를 듣고 방에서 뛰쳐나온 딸아이가 가장의 의자에 허락도 없이 덥석 앉아버렸고,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아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습니다. “이 의자는 내 의자라고, 아무도 넘봐선 안 돼! 이건 우리 집의 규칙이야! 당장 내려오지 못해!”
딸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결국 눈물까지 보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가 그런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상한 규칙이야….”
이후 저녁 식사 시간은 침묵과 어색함이 한동안 지속되었지요. 한참 진정한 후에 생각했습니다. 우리 집에도 시저가 한 마리 살고 있었구나! 나에게 편한 규칙을 만들어내고 강압적으로 행사하는 모습은 이후에도 저의 생활 곳곳에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아닌 척 선한 척하는 흔한 집안의 권력자였던 것입니다.
시저가 사는 숲은 겉보기엔 고요함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한 치의 동정심도 허락지 않는 치열한 삶이 요동치는 고요입니다. 시저는 그 속에 권력자로 우뚝 살고 있습니다. 죄책감과 동정이란 것은 저 멀리, 아니 생각해보지도 않은 단어이지요. 하지만 시저도 주어진 삶에 충실한 일원일 뿐, 연약했던 어린 시절을 버텨왔고, 힘이 강해지며 자신만의 숲의 규칙을 자연스럽게 만들고 당연한 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숲은 시저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안엔 작은 새끼 새도, 목을 축이는 노루도 함께 살고 있습니다. 시저가 용기 내어 규칙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숲은 항상 공포스런 고요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시저가 사는 숲보다 나은 곳일까요?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어집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 규칙에 대한 의심은 약한 자가 아닌 강한 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규칙을 정할 수 있는 강자만이 그 규칙을 변화시킬 수 있으므로….처음 천상천하유아독존인 시저의 숲은 무채색과 초록으로만 표현했습니다.
시저만의 숲에 어느 날 새알이 노란 점박이를 머금고 등장하고, 그날 이후 시저의 규칙엔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달을 보며 “어쩔 수 없어. 이건 숲의 규칙이니까!”라고 되뇌던 시저의 차가운 마음에 노란 달빛이 점점 스며들 듯 솜사탕 같은 노란 아기 새들이 탄생하고, 어린 시절 생긴 깊은 상처의 색깔마저 점점 노란빛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시저는 자신이 변화했음을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 느끼게 되고, 마지막 장면 무채색의 숲은 용기와 희망을 머금고 다채로운 색을 발하게 됩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말’을 다시 한번 적어봅니다.
“계절은 계속 바뀔 것이고, 숲은 조금씩 변화할 것이다. 변화 있는 규칙을 만들어갈 내 자신을 기대해본다.”
유준재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에서 섬유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최근작으로 『정연우의 칼을 찾아 주세요』에 글을 썼고, 그림책 『마이볼』 『엄마 꿈속에서』 『파란파도』 『균형』을 작업했습니다. 2007년 『동물 농장』으로 제15회 노마 콩쿠르에 입상했고, 2015년 『파란파도』로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되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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