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4
비가 오지 않아도 언제 올지 모르니까
우산을 써야 해.
갑자기 비가 올지도 모르잖아.
이제는 비가 올까 봐 걱정하며
우산을 쓰지 않아.
비가 올까 봐
김지현 글·그림 / 30쪽 / 22,000원 / 달그림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나에게는 질기게 남아있었던 적이 있었다. 비가 내리던 날 밤. 휴가지의 마트 주차장 화단에서 검정개를 봤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개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순간 겁이 났고 내가 망설이는 동안 그 개는 화단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다른 개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비가 내리는 날 밤이면 문득문득 그 유기견이 생각나긴 했지만, 눈앞에 닥친 일들에 치여 살며 서서히 잊혀갔다. 몇 해가 지나 우리 가족은 개를 입양했다.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같이 있으니 한동안 잊고 있던 그 유기견이 떠올랐다.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기회가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리 좋은 보호자는 아니었다. 내 일이 우선이고 무책임해지기 싫어서 나 말고 다른 가족들도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려면 더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늦었던 것 같다. 갑자기 반려견에게 발작이 왔다. 개 공장에서 나고 자라서 선천적으로 심장과 폐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커졌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려견은 한결같이 오늘 하루를 신나게 살며 불안한 내일의 걱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안도하며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예상치 못한 일로 흔들릴 때가 있다. 너무 앞선 것. 먼 것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지금 것도 망치게 된다. 순간에 충실하면 된다는 일상의 깨달음을 반려견이 알려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비가 내리던 날 밤의 기억은 가슴속 응어리가 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세상 밖에 꺼내놓고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창밖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비가 쏟아졌고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허겁지겁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 유유히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한 사람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문득 우산은 비를 피하고자 미리 챙긴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늘 보고 알던 것이 처음 본 것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우산이 내게 그러했다. 한동안 우산이란 사물을 들여다보다가 비가 오지 않을 때도 우산을 쓰고 다니는 이야기를 써볼까 하며 이야기 소재가 생겼다.
이 그림책의 화자인 B씨는 평소에도 비가 올 것을 걱정하며 우산을 쓰고 다닌다. 진짜 우산을 써야 할 때를 모르며 자신이 정한 틀에 갇혀버린 것이다. 비가 갑자기 쏟아질 때 미리 우산을 쓰고 있어서 비를 피했지만 강한 바람 때문에 우산이 뒤집히게 된다. 대비했지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연히 만난 유기견에게 우산을 씌워주면서 변화가 찾아온다.
각자 다르지만,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스며들며 B씨는 붙잡고 있던 불안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그 긍정의 변화를 다른 존재에게도 나눠준다는 이야기이다.
먼저 비 오는 날의 사람들을 보며 관찰 드로잉부터 시작했다. 한 장씩 그린 뒤 모아 편집하다 보니 수평으로 긴 공간이 생겼고 더미북도 가로로 길게 만들면서 자연스레 병풍 판형이 되었다. 페이지 전체를 펼치면 4미터로 이어진 그림을 흐르는 시선으로 볼 수 있는데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옆에서 관찰하기에는 알맞은 제본 방식이었다.
앞면은 관계의 두려움으로 닫힌 마음을, 뒷면으로 넘어가면서 변화로 인해 열린 마음을 보여주려 했다. 표현 기법은 검은색을 주조색으로 쓰면서 선에 힘을 주고 싶어 목판화를 선택했다. 나에게는 새로운 시도였다. 실제 책 크기와 같은 판에 작업했기에 금방 끝날 것 같았는데 판만 파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양각으로 파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미련해 보일 수 있겠지만 가슴에 하나하나 새기며 수행하는 마음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과거의 일을 바꿀 수도 없지만, 앞으로의 나 자신에게는 떳떳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종이에 찍을 때는 프레스기 없이 발로 밟아 찍었는데 일정하게 찍히지 않아 여러 번 수정하고 찍기를 반복했다. 나름 철저히 계획했지만, 매번 다르게 나오는 결과물을 보고 불안해하는 작업 과정에서 B씨와 함께 성장한 것 같다.
살아가면서 새롭게 무언가를 한다는 것, 누군가를 만나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것에 두려움이 넘쳐 스스로 한계의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머무르려고 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다가올 때마다 회피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마주 본다면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살아가길 바랄 때마다 이 책을 펼쳐 보길 조심스레 바라본다.
김지현 작가는 『비가 올까 봐』를 처음으로 쓰고 그렸습니다. 일상적으로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 속에 담긴 소중한 의미를 찾으면서 그림책을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