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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Mar 07. 2022

“어디서 제 이야기를 들었어요?”

동네에서 만난 작가 1 - 황영미

청소년 소설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를 읽고 황영미 작가를 언젠가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뒤에 남겨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시절이 있었다. 그때 살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도봉도서관 문학 서가에 꽂혀있던 책을 거의 다 읽었던 것 같다. 소설을 읽기 시작하며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때 무얼 만났는지 묻고 싶었다. 읽었다고 바로 돈이 되지 않는 문학을 만나 무엇을 얻을 수 있었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다. 다만 코로나19라는 엄중한 상황 때문에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언젠가 수원의 동네책방에서 유쾌한 작가를 진짜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혹시 제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2019년 출간된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이하 체리새우)는 입소문이 나며 1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다. 일본에도 저작권 수출이 되어 ‘체리새우, 나는 나’라는 제목으로 긴노호시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청주, 원주, 담양, 구미, 완도, 의정부 등에서 ‘한 책 읽기’ 도서로 선정되어 작가는 전국의 독자를 만나느라 분주한 날들을 보냈다. 신기하게도 현장에서 만난 십 대들은 하나같이 “작가님, 어디서 제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고 물었다. “혹시 우리 엄마나 이모가 작가님에게 제 이야기를 귀띔했어요?” 하고 되물을 만큼 소설이 자기 이야기 같다고 말했다. 다섯 명이 친하게 지냈는데 아람이 같은 애가 여왕 노릇을 했고 친구들에게 묘하게 따돌림을 당했노라고 소설 속 다현이와 똑같은 일을 겪었다며 울먹였다. 교사들로부터는 “책이라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학생이 유일하게 끝까지 읽은 작품이 『체리새우』였다”라는 말을 들었다.


일원으로 지내다 은밀한 따돌림을 당하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 은따를 당한 적이 있는 다현이는 중학교에서 사귄 다섯 손가락 친구들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공부도 못하는 애가 자신감이 넘치면 재수 없어” 보이기에 뭐든 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친구들 몰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리더인 아람이가 싫어하는 아이들과는 말도 섞지 않고 친구의 궂은일도 대신한다. 그러나 새 학기가 되어 다현이는 자신을 숨기며 다섯 손가락에 남아야 하는지 아니면 혼자가 되더라도 나답게 살 것인지 갈림길에 선다. 은따 이야기로 문을 열어 결국은 나답게 살기로 문을 닫는 작품이다. 주제는 묵직하지만 십 대 소녀의 일기장을 옮겼나 싶게 가볍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문체를 지닌 작가는 대체 몇 살일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황영미 작가는 83학번이었다.


소설에는 주인공 다현이 말고도, 가까워지는 걸 두려워하는 은유, 친구를 조종하는 아람이, 친구라고 믿었지만 아람이를 택한 설아, 다현이가 좋아하는 남자아이 현우 등 여러 캐릭터가 나온다. 인터뷰 내내 황영미 작가는 소탈한 모습으로 자신이 얼마나 덜렁대는지를 웃으며 털어놓았다. 가끔 십 대 커뮤니티에 들어가 나이를 잊고 흥분할 때도 있다고 고백했다. 다현이의 모습에 작가의 성격이 많이 투영되었겠다 싶었다. “소설 속 캐릭터 중 누구와 가장 닮았냐”고 질문했더니 의외로 해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해강이? 다현이가 좋아하던 현우도 아니고 십 대 독자들이 다현이와 사귀길 소망하는 시후도 아니고, 해강이라니 싶어 다시 책을 뒤적거렸다.


살기 위해 읽고 썼다

해강이는 소설에서 어휘력이 부족해 “대박!” 소리를 잘하고, 엉뚱한 말을 해서 친구들을 웃기고, 자신이 너무 잘생겨서 영화배우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그러나 동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여린 녀석이다. 타인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고 남들이 보기에 어이없을 만큼 자신을 믿는 아이다. 황영미 작가 안에는 해강이 같은 긍정이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 작품이 나오면 세상이 뒤집어”질 만큼 재미있다는 흥분과 도취감으로 글을 쓴다고 했다. 흔히 생각하는 차분하고 조신한 작가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작가라고 해강이로만 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해강이라고 해도 어느 시절에는 은유로 살고 어떤 관계에서는 설아처럼 군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모습을 수시로 바꾼다. 남들에게 비치는 내 모습을 의식하고 그 모습대로 나의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나답지 않은 일을 하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다. 십 대는 이 길고 긴 관계의 줄다리기를 시작하는 시기다. 어른들이 인간관계로 고민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관계의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쓸려 다닐 게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 작가가 『체리새우』를 통해 십 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다현이가 관계의 불안을 견디기 위해 읽고 쓰는 것, 폐쇄적인 다섯 손가락과 다른 열린 성격의 모둠을 보여준 것,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살고 관계 맺는 캐릭터를 등장시킨 것 등은 모두 하나의 관계밖에 경험하지 못한 십 대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는 장치다.


작가는 지독한 상실을 겪고 몸이 아팠던 적이 있다. 26년 전 도봉도서관에서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소설을 읽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사람과 세상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엄마가 돌아가신 후 어찌할 도리 없는 슬픔을 다스리는 방편이었다. 도저히 이대로 살 수가 없어서 엄마랑 살았던 어린 시절의 행복한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소설이 『판타롱 순정』이었고 다 쓰고 나니 상실감을 다스릴 수 있었다.


문학을 통해 누군가 죽어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세상이 돌아갈 수 있는지, 사람들이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인생을 견디는 방편으로 읽고 쓰는 사람이 되었고 이제 십 대들 편에 바짝 다가선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살다 보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아무도 나를 위로해줄 수 없고 살아갈 자신이 없는 순간이 온다. 이때 『체리새우』를 읽고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는 십 대가 있다면, 문학이 작가에게 다가온 만큼 누군가에게도 기적을 만들어줄 테다.


한미화_출판 칼럼니스트, 『아홉 살 독서 수업』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1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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