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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Mar 11. 2022

함께 읽으며 만드는 단단하고 충만한 시간

동네에서 만난 작가 3 - 황유진

마감이 없으면 글을 쓸 엄두를 내지 않는 나는 스스로 글을 생산하는 필자들이 놀랍다. 블로그든, 브런치든, SNS든 1인 미디어가 생겨난 덕도 있지만 불러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 길을 만들어간 글쟁이들은 존재 자체로 경이롭다. 『어른의 그림책』『너는 나의 그림책』을 펴낸 황유진 작가도 그중 한 사람이다. 힘과 도전 정신이 충만한 청년기를 지나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작가이자 번역가로 또 ‘그림책 37도’의 대표로 자기 직업을 만들어낸 동력은 무엇일까. 



나를 찾아가는 과정

인터뷰 전에 짧은 황유진 연보를 만들어보았다. 두 권의 책을 출간할 수 있었던 잠재적 에너지를 찾고 싶어서였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10여 년 정도했다. 첫째와 둘째를 낳고 2015년 육아휴직을 했는데 이때 한겨레문화센터의 ‘그림책으로 시작하는 번역’ 수업을 들었다. 세 번째 수업을 들으며 번역이 직업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황유진 작가는 직장인 DNA가 있다고 믿을 만큼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둘째를 낳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지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즐겁고 충만하고 소중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나라는 존재를 확인시켜줄 수 있는 일, 경제활동을 해서 구체적으로 돈을 버는 일이 필요했다. 내 이름 석 자만으로 자존할 만큼 단단한 사람도 많지만 이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황유진은 『어른의 그림책』에서 “불안이 나를 이끈다”는 말을 한다. 존재의 의미를 확인해야 안심이 되는 유형의 사람인 것이다. 불안이 그를 황무지로 내몰기도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쉼 없이 도토리를 주우러 다니고 출발선에 자신을 세운다. 내가 만난 황유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황유진 작가를 이끈 수업은 ‘그림책 번역의 세계’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번역가 김선희 선생이 지도한다. 그는 입문 과정을 마치고 심화 과정을 듣고 다시 ‘한겨레 어린이·청소년 번역가 그룹 소속’ 번역가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2년 남짓 시간이 흘렀지만 데뷔는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 기획서 쓰던 실력을 발휘해 여성 인물 그림책을 여러 권 모아 출간 기획서를 만들고 출판사에 투고했다. 그 노력이 씨앗이 되어 2017년 『내 머릿속에는 음악이 살아요!』를 출간하며 마침내 번역가가 되었다. 데뷔하려면 최소 3년은 버텨야 한다던 김선희 선생의 말처럼 첫 번역서가 나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


첫 책을 내기까지 

황유진이 그림책을 처음 만난 건 2009년이다. 세계 일러스트원화전을 관람하며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를 운명처럼 만났다.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문청이었지만 IT회사에서 일하며 시나 글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부지런히 보고서를 쓰던 직장인에게 한 권의 그림책이 하늘에서 ‘쿵’ 하고 떨어진 거다. 어쩌면 젊은 날 좋아했던 시가 그림책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 것인지도 몰랐다. 한동안 잃어버렸던 감수성을 그림책에서 다시 만났다. 그림책이 시집 같았다. 이후 결혼과 육아를 거치며 두 딸에게 부지런히 그림책을 읽어주었고 그림책 카페에서 맹렬하게 활동했다. 엄마가 된 후 아이와 함께 그림책 읽는 즐거움은 최근 펴낸 『너는 나의 그림책』에 가득 담겨있다. 


그것으로 족할 수 있었을 그림책 사랑은 직장 선배의 제안으로 그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예술심리교육센터 마인드플로우를 운영하던 선배가 퇴사한 그에게 직장인 대상 강의 프로그램에 그림책을 활용하자고 제안한 것. 마인드플로우와 함께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1년여를 보낸 후 ‘그림책 37도’로 독립했다. 이 시간 동안 그림책을 읽어주면 우는 중년 여성부터 눈을 반짝이던 직장 남성까지 다양한 어른들과 그림책으로 만났다. 『어른의 그림책』은 이 시절 그림책을 함께 읽은 이야기다. 함께 그림책을 읽은 시간과 감정과 대화가 생생하게 책 속에 담겨있다. 


그림책을 함께 읽는 일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도서관에서, 작은 책방에서, 그림책 37도의 정기 모임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심화 버전이라 할 글쓰기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림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합평하는 ‘기대어 씁니다’라는 글쓰기 강의다. 황 작가에게 글쓰기 강의를 하게 된 이유를 물으니, 소통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답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아이들과 집에 갇혀 있다시피 하니 말이 통하는 어른과 관심사를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간절했다. 처음 직업을 만들게 된 것도, 비슷한 사람들과 연대를 꿈꾸게 된 것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혼자여야 하는 시간을 극복해가는 과정이었다. 


누가 왜 글을 쓰나요?

소규모 강의에서 강사는 수강생들이 도달하고 싶은 깃발과도 같다. 예컨대 그림책 활동가이자 『마흔에게 그림책이 들려준 말』의 저자 최정은의 그림책 수업에는 쉰 전후의 독자가 모인다. 반면 황유진 작가의 강의에는 대개 30~40대의 엄마들이 온다. 황유진 작가가 엄마라는 이름 말고 강의와 쓰기에서 다른 존재의 가치를 찾았듯 비슷한 소망을 품은 이들이다. 워킹맘이든 휴직 중이든 전업주부든 엄마 말고 다른 호명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나라는 존재가 지워지지 않도록 애를 쓰는 이들이다. 인간은 표현의 동물이다. 누구는 노래가, 누구는 쇼핑이 욕망과 표현의 수단이 되듯 쓰기는 강력한 자기표현의 수단이다. 물론 지극히 소수의 사람이 그럴지라도 말이다. 

혹시 먼저 길을 걸어간 선배로서 비슷한 꿈을 꾸는 이들에게 해줄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이가 손꼽은 것은 꾸준히 쓰는 것. 황 작가의 블로그에 가보면 얼마나 오래 꾸준히 썼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2016년 남동생이 발행한 독립잡지 『월간 그런사람』에 필자로 참여한 적도 있다. 이 꾸준함이 황유진의 자산이다. 물론 꾸준히 쓰기 쉽지 않다. 그래서 글 공동체가, 글벗이 필요하며 처음 글을 쓰는 이들끼리의 칭찬과 지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살다 보면 내면의 공간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주어진 역할에 맞춰 살다 보면 자신이 그런 사람인 줄 착각할 때도 있다. 혹은 그 역할을 버려야 할 때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황유진은 그 상실을 ‘홀로 충만하게 존재할 수 있는 구덩이’를 파는 일로 바꾸었다. 그 구덩이에서 그는 그림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한미화_출판 칼럼니스트, 『동네책방 생존 탐구』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1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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