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만난 작가 5 - 김필영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정기구독 서비스가 대세다. 나 역시 종종 정기구독을 신청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몇 번 보지 못한 채 한 달이 끝날 때가 많다. OTT나 유튜브 같은 영상은 시간을 뭉텅 잡아먹기에 조심하는 데다 텍스트에 비해 영상은 효율이 떨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료조사를 하다 우연히 ‘5분 뚝딱 철학’이란 유튜브 채널을 만났다. 어렵다고 소문난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이론을 설명하는 영상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이 채널에 또 뭐가 있나 뒤적이다 생각보다 많은 ‘철학’ 콘텐츠가 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 라캉이나 비트겐슈타인을 유튜브로 만나다니, 소름이 돋았다.
유튜브 ‘5분 뚝딱 철학’을 운영하는 김필영 선생은 전기공학을 전공한 후 한국도로공사에서 전기 및 각종 시설물의 총괄 관리를 책임지는 직장인이다.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도 직장을 다니며 철학 박사학위를 딴 범상치 않은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불안과 걱정이 많았다. 나중에야 자신이 범불안장애가 있다는 걸 알았다. 걱정이나 근심이 지나치게 많은 불안장애는 인구의 25퍼센트 정도가 겪을 만큼 보편적이다. 그렇다고 당사자에게 고통이 덜한 건 아니다. 사람들과 부딪혀야 하는 모든 관계가 만만치 않았다. 이 불안이 그를 심리학과 철학으로 이끌었다. 2011년 외대 철학교육과 야간 대학원에 다니며 본격적인 철학 공부를 시작한다.
무릇 직장인이란 주중에는 직장을 다니느라 힘이 드니 주말에는 돈을 쓰며 쉬어야 한다. 그는 정반대였다. 주말의 철학 공부로 직장 생활의 고단함을 위로했다. 직장인으로 사는 괴로움을 철학 공부로 돌파한 셈이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광장과 밀실이 필요하다”며 밀실에서 한 공부 덕분에 직장인으로 번아웃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칼 융은 인간에게 외적 인격과 내적 인격이 있다고 말한다. 흔히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외적 인격에 압도되지 않으려면 내적 인격을 돌봐야 하는데 이 역할을 철학 공부와 유튜브가 해주었다. 특히 내향적인 그의 무의식에서 잠자고 있던 욕구는 유튜브를 만나 건강하게 발산된 듯 보였다. 그가 만든 영상에 담긴 깨알 같은 유머가 증거다. 생전에 헤겔이 비트겐슈타인을 만나 했던 마지막 당부가 있단다. 무엇일까? 그의 영상에 따르면 ‘좋아요와 구독하기’란다.
외대에서는 임일환 교수의 지도 아래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시간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논문을 다듬어 첫 책 『시간여행, 과학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들녘)를 출간했다. 책을 홍보하기 위해 출판사는 5분 정도의 홍보 영상을 만들었다. 몇 차례 수정이 필요했는데 그때마다 외주사는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 안 되겠다 싶어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공부했고 직접 추가로 책 내용을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었다. 그러다 지금껏 공부한 철학사를 정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구독자’도 ‘좋아요’도 없었다. 2019년 5월 분석철학의 창시자인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를 담은 ‘비트겐슈타인-원더플 라이프’를 업로드하며 구독자가 늘기 시작했다. 2020년 구독자가 1만을 넘어섰고, 2020년 말 구독자 10만을 돌파했으며, 2021년 9월 현재 구독자는 14만 명 수준이다. “홍보와 마케팅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느냐”고 묻자 그가 답했다. 구글 신이 전능하다고. 유튜브 알고리즘이란 대단하다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2020년 말 유튜브를 기본으로 한 『5분 뚝딱 철학』(스마트북스)이 출간되었다. 2021년 ‘세종 도서’와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로도 선정되었고 지금껏 1만 부 정도가 판매되었다. 본격 철학책으로는 놀라운 성과다.
그가 직접 만든 유튜브 영상은 지금껏 150여 개 정도. 주중 저녁 시간에 자료를 찾고 스크립트를 만들어 주말에 촬영하고 편집해 매주 화요일 업데이트한다. 10분 정도의 영상을 외주 없이 직접 편집하는 데 하루 반나절 정도가 걸린다. 11월에는 『5분 뚝딱 철학』 2권을 출간할 예정이다.
『5분 뚝딱 철학』은 한마디로 ‘단숨에 읽는 철학 사전’이다. 철학사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상을 시대와 계통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차례대로 읽어도 좋지만 필요에 따라 읽어도 유용하다. 예컨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시대적 논의가 궁금하다면 디오게네스, 프로타고라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공리주의, 파스칼, 니체, 한나 아렌트 등 윤리학을 다룬 철학자들을 차례로 만나 체계를 세울 수 있다. 어려운 철학적 개념어를 상쇄할 입말투의 글과 적절한 비유도 감칠맛이 난다. 그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를 ‘정신승리 대 안빈낙도’의 철학이라고 똑 부러지게 정리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인생 학교’로 계승하기도 했는데, 이 철학 그룹에 대해 모호하던 개념이 머릿속에 딱 잡힌다.
뭐니 뭐니 해도 『5분 뚝딱 철학』의 백미는 영상과 책의 보완적 관계다. 유튜브 영상은 ‘보여주며 말하니’ 쉽지만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선형적 미디어인 책이 있어 영상의 이런 빈틈을 채워준다.
어쩌다 보니 심리 상담이 필요한 절실한 순간에 철학 공부를 시작한 이들을 연거푸 만났다. 지난 인터뷰에서 소설가 정아은이 그랬고 이번 김필영 선생도 비슷하다. 철학 공부의 쓸모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철학을 공부하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메타인지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철학은 대상에 대한 이론보다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가 더 중요하다. 철학적 질문이란 결국 당대 사회, 정치, 문화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질문을 이해하면 스스로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질문할 수 있다.
유튜브 영상은 한계가 있지만 장점도 확실하다. 해당 분야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춰준다. ‘5분 뚝딱 철학’이 철학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듯 말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 더 욕심을 내서 철학과 친해지고 싶다면 마음에 맞는 철학자를 찾아 원전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정아은에게 마르크스가, 김필영 선생에게는 칸트가 그런 철학자였다.
한미화_출판 칼럼니스트, 『동네책방 생존 탐구』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1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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