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즐기는 그림책 문화 열릴까?
집안 어딘가에
그림책을 책표지가 보이게 놓아 두면,
자신만의 미술관이 되고
취향을 즐기는 일이 된다.
어린이책방을 처음 연 1990년대 중반, 책방에서 판매할 수 있었던 단행본 그림책은 그 수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대부분 외국 그림책 번역본이었고 우리나라 창작그림책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였기에, 어린이책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다면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 『만희네 집』 『솔이의 추석 이야기』 『강아지똥』 등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부터 움트기 시작한 우리나라 그림책 창작 열기는 2000년대가 되자 한 해에 100여 종이 훨씬 넘게 출간되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때 나온 책들은 대부분 옛이야기 그림책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재료와 기법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활기가 있었다.
그 무렵 그림책을 보고 자랐던 취학 전 연령대의 친구들이 어느덧 20대 청년층이 되어 책방을 찾는다. 이제 그들이 그림책의 독자가 되어 구매자로 돌아온 것이다. 어렸을 적에 어른이 그림책을 사서 보여줬다면 지금은 자신들이 직접 고르고 사서 선물하는 세대로 바뀌었다. 마치 한 세대가 지난 것처럼 2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림책을 스스로 골라보는 최초의 소비자가 생겨난 일은 곧 진정한 독자가 탄생한다는 의미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어린 시절 그림책과 지금은 뭐가 달라졌을까. 만약 지금 아파트에서만 20년가량을 살아온 청년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마당이 없는 장방형의 방 몇 개, 학교, 학원, 마트…. 이렇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뭔지 모를 자신만의 흔적을 저장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봉지에 든 과자이다. 일하러 나가시는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광주에서 가장 컸던 충장로 입구 8.15제과점에 내렸다. 그곳에서 봉지 하나 가득 생과자를 사주시면 나는 하루 종일 그걸 먹고 지냈다. 먹을 것이 풍족했던 때가 가장 넉넉하고 좋았다. 하지만 두 해 정도 지난 여덟 살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신 뒤 막내였던 나는 혼자가 되었다. 모든 것이 뒤숭숭해졌다. 집에는 무당이 자주 와서 굿을 했고 또 어떤 날은 오래된 집 마당에 먹구렁이가 나타나기도 했다. 어머니를 비롯한 어른들과 형들, 누나는 아버지의 병구완에 바삐 움직이다 보니 내 존재는 까마득해져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 뒤꼍 마루가 나의 피신처가 되어 그곳에서 동화책 여러 권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책들은 산 지 얼마 안 된 전과를 헌책방에서 바꿔온 거였다. 함께 어둡고 그늘진 곳에서 책을 보았던 친구들은 모두 남쪽 고향을 떠나 아주 멀어졌다. 기껏해야 동화책에 그려진 삽화가 그림의 전부였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보는 그림책의 일부는 분명 그 시절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지방도시 평범한 가정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 모습은 움직임이 없는 흑백사진처럼 남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내게 지워지지 않는 판타지로 남아 있다.
어린이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그림책 만들기를 하면 어린이는 주로 상상 속의 일을,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기억 속 일을 끄집어내어 그려낸다. 그림책작가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지 않을 때는 자신의 이야기나 훨씬 폭넓은 인생을 화폭에 그리면서 말한다. 사계절에서 최근 선보인 윤석남, 한성옥의 그림책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는 그런 점에서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른에게 선물하는 ‘그림이 있는 책’이다. 화가 윤석남은 어느 날 우연히 어린이책방에 들어갔다가 한 권의 그림책을 발견하고 그림책이라는 세계에 매료된다. 말없는 그림 문학, 모든 이민과 망명객과 난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그 책은 숀 탠의 『도착』이었다. 그림책은 아이들이 보는 책으로만 알았던 화가에게 그 그림책의 낯선 풍경은 몹시 경이롭고 새로운 회화 세계였을지 모른다. 화가의 전시장에서 만난 그림책작가 한성옥과의 다정한 동행은 결국 이 ‘그림이 있는 책’을 탄생시킨다.
가느다란 줄 하나의 그림으로 시작하여 다음 장을 넘기면 줄은 둘이 되고, 또 다음 장을 넘기면 비로소 그 두 줄에 매달린 그네에 아주 작은 집이 올라타 있다. 그 작은 집의 작은 방에서 “겨울 숲 속에서 만난, 푸른 하늘이 창문에 머무는, 세상에서 제일 작은 店. 내 방”이라는 윤석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힘들었던 시기에 마치 일기처럼 담담히 고백한 글과 드로잉 작품 서른두 점이 어울려 힘든 고백을 풀어 놓았다. 그래서 이 그림책은 어른을 위한 책이라고 해야 맞을 듯싶다. 세밀한 감정의 변화를 그림과 글을 보면서 따라가는 감상법이 그림책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절로 터득된다.
여기에 보림에서 출간한 ‘The Collection’ 시리즈는 독자 영역을 더 넓혀가는 데 한몫하고 있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수준 높은 복제 예술품을 보급한다는 취지로 기획한 이 시리즈는 과감한 시도를 통해 그림책의 기존 개념을 바꾸어 놓은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내보인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들과 팝업북의 대가 로버트 사부다가 “지금까지 내가 본 책 중 가장 혁신적이고 유쾌한 팝업북”이라고 극찬한 『ABC3D』가 들어 있다. 또 수공예품의 백미라고 일컫는 『나무들의 밤』은 나무의 기원과 정령들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가 인도 곤드족의 전통 예술을 통해 펼쳐진다. 14명의 장인들이 직접 손으로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실크스크린 작품이다. 이 시리즈가 ‘그림책은 작은 미술관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그 집 이야기』도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극사실화를 보는 즐거움을 선물한다. 책 속 시의 운율을 느끼게 하는 명문장을 대하노라면 그림책을 가슴에 품고 싶은 충동마저 생긴다. 『마르게리트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역시 노년의 삶을 이토록 가슴 저리게 묘사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모든 세대, 특히 중년에게는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책이다.
집안 어딘가에 그림책을 책표지가 보이게 놓아 두면, 자신만의 미술관이 되고 취향을 즐기는 일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늘 곁에 두고 볼 만한 책을 어렵지 않게 구하고 볼 수 있다. 또 그것들을 감상하고 알아볼 수 있는 독자들이 나오고 있다. 나 역시 지난 시절의 판타지를 그림책에서 찾는다. 프랑수아 플라스의 ‘오르배 섬 사람들이 만든 지도책’ 시리즈가 그런 경우이다. 이 시리즈는 시인 랭보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정병규_어린이책예술센터 대표, 헤이리동화나라 대표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16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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