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서 찾은 아흔 살 삶의 기쁨

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14

by 행복한독서
딸이 숙제로 내준 쑥갓 꽃을
찬찬히 살펴보던 할아버지는
선과 색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도화지에 담습니다.


쑥갓 꽃을 그렸어

유춘하, 유현미 글·그림 / 36쪽 / 12,000원 / 낮은산





『쑥갓 꽃을 그렸어』는 우연히 세상에 나오게 된 그림책입니다. 물론 중간에 그림책으로 구성하고 엮어내는 과정이 있긴 했지만요. 이 책의 주인공인 아흔 살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자식들 집에 다니러 온 여름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뜻밖의 흥미진진한 일이요.


아흔 살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제는 무척 쇠약해지셔서 책 첫 장에서 말씀하시듯 ‘누워서 쉬는 것이 제일 편하다’ 하시지요. 그렇지만 자식들 집에 와서도 계속 누워만 있으면 따분하잖아요. 그래서 한참 그림을 그리던 제가 문득 여쭈었지요. “아버지, 그림 그리실래요?” 안 한다고 손사래 치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대수롭지 않게 “그러든가!” 하시는 겁니다. 첫 그림은 크레파스로 그렸어요. 크레파스는 다루기가 쉽잖아요. 도화지에 낙서하듯 마음대로 칠해 보시라고 크레파스를 권해 드렸지요. 아버지는 당신이 그림 그리기에 가장 편한 자세인 쪼그려 앉은 자세를 하고 아이로 돌아간 듯 마음대로 색칠을 하고 동물도 사이사이에 그려 넣으셨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저는 깜짝 놀랐어요. 색깔이 단조롭지 않고 알록달록 화려하고, 구성도 재미있는 거예요. 저는 다음 단계로 슬쩍 넘어갑니다. “아버지, 수채화 해 볼까요?”


좀 ‘상당히’ 어렵지만 재미있으신가 봅니다. 제가 옆에서 알려드립니다. 지우개도 써 가며 밑그림을 그리고 붓으로 채색하기, 그림자 넣기. 스케치를 마친 뒤에는 잠시 낮잠을 주무시기도 하지만, 채색에 들어가면 어떤 힘에 이끌린 듯 중간에 쉬는 일 없이 집중하여 채색을 다 끝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주말농장의 텃밭 자두나무 아래에서 주워 온 자두 두 알을 일생의 첫 수채화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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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을 완성하고 나니 조금 더 해 보고 싶어지십니다. 아버지는 베란다에 있는 화분 중에 하나를 거실로 옮겨와 그립니다. 제목도 달고 날짜도 쓰고 서명도 합니다. 이제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다음 차례는 쑥갓 꽃! 텃밭에서 꺾어온 쑥갓 꽃을 보고 둘째 딸이 일하러 나가며 말합니다. “아버지, 오늘 숙제는 쑥갓 꽃입니다!” 보기에는 예쁘지만 그리기에는 무척 복잡해 보이는 쑥갓 꽃. 쑥갓 꽃 그림을 마침내 완성한 아버지는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낍니다.


아버지의 그림 여정은 움직이는 것을 그려보자는 시도로 탐색한 어항 물고기 그림, 북녘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임진강 반구정에서 그린 풍경화, 생애 처음 경험한 공작새와의 만남이 선사한 아름다운 깃털 그림, 그리고 색칠하지 않아서 덜 그린 것 같다는 연필로만 그린 커다란 나무 드로잉으로 이어졌지요. 자식 집에 머물렀던 보름 남짓한 동안의 대장정이 끝나고 아버지는 시골로 내려가셨어요. 내려가시기 전에 아버지 그림을 모아 거실 벽에 걸어 작은 갤러리처럼 꾸미고 아버지의 뜻밖의 싱그러운 성취를 축하해 드렸습니다.


평소 아버지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픈 바람이 있었던 저는 자식들 집으로 뿔뿔이 흩어진 아버지 그림을 한참 뒤에 다시 모았습니다. 그리고 꽤 오래전부터 녹취해온, 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와 그림 그릴 때 나눈 대화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그림책 구성을 하고 필요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어요. 물론 원고는 열여덟 번쯤 고치고 또 고쳐 완성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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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비교적 쉽게 수채화를 그리신 것은 아마도 평생 농사일기를 써온 손힘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도 일기를 쓰시거든요. 한자를 섞어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하시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하셨지만 놀이의 기쁨에 푹 빠져든 덕이 가장 크겠지요. 역시 인간은 놀 때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요. 이것은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들어맞는 진실임을 아흔 살 할아버지 유춘하 씨가 증명했달까요.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고 이제는 호호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의 그림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날마다 삶의 기쁨을 찾아 누리라고. 그것이 마땅히 할 일이며 세상에 온 모든 인간의 의무라고. 그리고 그것을 훼방 놓는 것이 있다면 싸워서 지키라고!



유현미 선생님은 『쑥갓 꽃을 그렸어』의 공동 저자 유춘하의 딸입니다. 아버지 유춘하의 말을 모으고 골라 이 책의 글을 쓰고, 유춘하의 그림을 뺀 나머지 그림 전부를 그렸습니다. 그림 전시회 ‘서 있는 사람들’ 전을 열었습니다. 『세밀화로 그린 동물 흔적 도감』 『갯벌에 뭐가 사나 볼래요』 들을 만들고, 『내가 좋아하는 야생동물』 『내가 좋아하는 갯벌』의 글을 썼습니다. 『쑥갓 꽃을 그렸어』는 첫 그림책입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7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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