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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Apr 19. 2022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살아남은 여성들의 이야기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아나 크리스티나 에레로스 글 / 비올레타 로피스 그림 / 정원정, 박서영 옮김 / 

100쪽 / 25,000원 / 오후의소묘



스페인에는 ‘잘난 체하는 쥐’ 이야기가 있단다. 잘난 체하던 쥐가 고양이를 신랑감으로 선택하는 바람에 잡아먹혔다는 내용. 이 이야기는 성에 차지 않는 결혼을 받아들이라고 위협한다. 비혼 시대에 우스운 소리다. 


이 책은 이야기를 다시 쓴다. 첫 페이지는 “옛날에 작은 쥐가 살았습니다”라는, 전형적인 옛이야기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와 달리 이미지는 공장에서 만든 털실, 지구본, 접이식 의자 등 현대의 오브제들을 나열한다. 옛이야기의 변용임을 알 수 있다. 쥐가 먼저 집을 마련하자 지나가던 동물들이 자꾸 묻는다. “넌 집도 있는데 왜 결혼을 안 하니?” 여성에게 결혼을 강권하는 사회 분위기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쥐는 힘이 세거나 훌륭한 상대가 아니라 노래를 잘 부르는 동물을 원했고, 가르랑거리는 새끼고양이와 결혼한다. 이때 책의 오른쪽에는 “쥐는 가장 작은 새끼고양이와 결혼했죠”라는 텍스트가, 왼쪽 페이지에는 인간 남녀의 결혼사진 이미지가 있으니, 쥐의 결혼은 곧 인간 여성의 결혼임이 명백해진다. 


지금까지는 쥐가 이야기의 초점 화자였지만, 곧 고양이로 초점 화자가 바뀐다. 결혼식에서 쥐는 “고양이 음식을 먹는 바람에” 배탈이 나고, 온갖 소동 끝에 코가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다(결혼 첫날부터 낭패를 당하는 쥐는, 가부장제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고난을 겪는 여성을 말한다). 그러자 고양이는 쥐의 코를 꿰맬 실을 찾아 떠난다. 고양이의 여정은 옛이야기의 익숙한 형식을 띤다. 무언가를 구하기 위한 여행에서,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미션이 연쇄적으로 생긴다. 고양이는 제빵사, 방앗간 주인, 밀밭, 우물, 매듭장이를 찾아 나서지만 결국 빈손으로 되돌아오고야 만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커진 고양이의 이미지는 책의 페이지를 꽉 채우며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고양이는 집으로 돌아와 쥐의 상처를 혀로 핥아주다가 쥐를 잡아먹어 버린다. “홀랑 먹어버렸답니다”라는 텍스트가 적힌 페이지를 펼치면 총 네 페이지에 걸친 큰 이미지가 나오는데, 이 이미지가 매우 충격적이다. 집의 실내에는 책 초반부에 등장한 오브제들이 풍비박산되어 깨져있고 한 여성이 벽에 기대어 간신히 서있다. “고양이 발톱 사이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모든 쥐들에게”라는 헌사가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바쳐진 것임을 그제야 가슴 아프게 깨닫게 된다. 


줄곧 쥐와 고양이로 비유해온 서사는 가정폭력으로 깨져버린 결혼을 표현하는 이미지로 끝이 나고, 이제 여성의 서사가 그림책 전면에 등장한다. 여성은 어질러진 집을 정돈하고, 길게 땋은 머리를 가위로 자른다. 이전 삶과의 결연한 결별과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 창문 바깥 나무에는 새순이 돋고 있다.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집안을 가득 채운 여성은 길을 나선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무조건 순응하라는 옛이야기를, 잡아먹히고도 끝내 살아남는 오늘날 이야기로 바꾸어놓는다. 


김유진_동시인, 아동문학평론가, 『나는 보라』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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