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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Jun 10. 2022

짧은 틈새의 마주침

자연의 시간

황경택 지음 / 288쪽 / 18,000원 / 가지



아침에 눈뜨면 하늘부터 본다. 붉은 여명에 불타는 하늘, 화선지 위 먹물처럼 무거운 하늘, 쏟아지는 빛살에 눈부신 하늘, 분분한 눈발로 가득 찬 하늘. 하늘은 한시도 같지 않다. 집 앞 저수지 물빛도 날마다 변한다. 잔잔히 흔들리다 어둡게 침잠하고, 환희롭게 반짝이다 몽환적인 물안개로 자욱하다. 나는 넋을 놓고 중얼거린다. 

“정말… 하루도 같은 날이 없어.”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 책머리 첫 문장에 화들짝 데었다. ‘뭐야, 이 저자.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잖아?’ 태생적으로 나는 관찰자이고 기록자다. 낮은 눈높이로 들여다보고 쓰고 그리기를 즐긴다. 풀과 꽃과 열매와 곤충들은 내 일상의 일부다. 조류와 양서류, 파충류에 대한 애정은 동류인 포유류에 못잖다. 책을 본 순간, 나는 저자가 나와 동류임을 확신했다. 왕성한 호기심과 탐구심, 지치지 않는 관찰과 기록 없인 나올 수 없는 책. 


개 세 마리와 저수지 둘레길을 날마다 산책한다. 겨울은 풀씨들 천국이다. 도꼬마리며 도깨비바늘이 눈 깜짝할 새 개들 몸에 들러붙는다. 박주가리 솜털 씨앗도 곳곳에서 흩날린다. 『자연의 시간』을 막 펼쳐 읽은 날, 산책길 낙엽 더미 위에서 씨앗을 매단 아까시나무 열매를 봤다. 반으로 쪼개진 마른 콩깍지가 책의 그림과 똑같았다. 책을 읽기 전엔 안 보였던 열매다.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건 아니다. 시선이란 이렇게 선택적이다. 

봄이면 고사리밭에 칡덩굴이 무성하다. 칡 순을 수없이 잡아 뜯으면서도 세 갈래 칡잎 모양에 의문을 가져보지 못했다. 광합성 효율을 위해 비대칭 디자인된 칡잎의 전략을 읽고 나니 칡이 달리 보인다. 개미를 끌어들이는 벚나무잎의 밀선, 간지럼 타는 배롱나무, 서로 다른 모양의 은행잎, 꽃가루 실명이라는 능소화의 거짓 괴담까지…. 저자는 관찰하고 기록할 뿐 아니라 의심하고 공부한다. 정보가 촘촘한 텍스트는 읽는 맛이 있다. 


그림도 묘하게 간질거리는 맛이 있다. 세밀화보다 세밀안(眼)이랄까. 그림의 정교함보다 눈길의 다정함이 먼저다. 반으로 자른 도토리 속의 도토리거위벌레 흔적, 질경이 잎맥 속에 든 질긴 심, 강아지풀에 매달린 매미 허물. 나는 화려한 꽃송이보다 이런 것들에 더 끌린다. 개양귀비 봉오리 옆에 손톱만 한 에일리언은 얼마나 유머러스한가. 수많은 별이 숨어있는 코스모스에 이르면 만물에 감춰진 마이크로(micro)한 세계의 우주(cosmos)적 신비에 감탄하게 된다. 


나무와 풀꽃에서 이끼와 지의류까지 뻗어나가던 저자의 관심은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한 낙과와 새똥에 이른다. 새똥이라니. 새똥이 심은 나무라니. 세밀화 식물 백과 정보책의 카테고리에 포획되지 않는 유쾌한 탈주와 파격. 이런 빈틈이 좋다. 


“풀은 가볍게 산다. 수백 년을 살고자 꿈꾸지 않는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죽음을 맞는다.” 

마른 풀이 보여주는 것도 결국 삶이다. 풀꽃도 곤충도 동물도 인간도 지상에 잠깐 머물다 간다. 그 짧은 틈새가 삶이고, 그 틈새의 마주침이 이 책이다.


김혜형_작가, 『자연에서 읽다』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2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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