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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Jun 09. 2022

라디오는 살아있다

라디오 탐심  김형호 지음 / 304쪽 / 16,500원 / 틈새책방

라디오 키즈의 탄생  김동광 지음 / 228쪽 / 15,000원 / 궁리



1974년 저녁 무렵이 떠오른다. 국민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 얼른 라디오를 켰다. 5시 10분이면 어린이 라디오 드라마 「태권동자 마루치」가 흘러나왔다. 우리 삼 남매는 라디오에서 떨어지면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어서 꼭 붙어서 파란해골13호와 싸우는 우리의 친구, 우리의 영웅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생 때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집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유일한 오락거리가 휴대용 트랜지스터라디오였다. 9볼트 건전지로 작동하니까 전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빨간색 라디오에 고무줄로 9볼트 건전지를 묶어서 가지고 다녔다. 고등학생 때는 라디오에 테이프를 틀고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이 생겨났다. 좋아하는 음악을 녹음하려고 바짝 긴장하면서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대학 때는 버스에서, 결혼 후에는 차에서, 라디오는 평생을 나와 함께했는데, 어디 나만 그럴까 싶다.


오늘날은 영상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다니는 어디선가에서 라디오 소리를 듣게 된다. 예전과는 다르지만 라디오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이런 라디오에 대해서 알려주는 책 두 권이 나왔다.


『라디오 탐심』은 마치 주파수를 맞추는 라디오와 같은 책이다. 챕터가 돌아갈 때마다 다른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이 책의 주된 관심은 라디오라는 하드웨어다. 책을 따라 읽어나가다 보면 라디오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에 대해서 하나하나 알게 된다. 라디오의 외양, 진공관과 트랜지스터, 스피커, 주파수 대역, 라디오를 만든 사람들과 회사까지.

특히 인상적인 이야기는 영국 라디오 TR-82에 대한 이야기였다. 회사마저 바뀐 60년 동안 동일한 디자인을 유지하는 라디오. 얼마나 멋진 디자인이기에 이렇게 살아남았나 싶고, 레트로 감성을 자극한 것일까 궁금했는데, 내막을 알고 나면 마술사의 비밀을 본 것처럼 허탈해진다. 원가절감을 위해 굳이 디자인을 변경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라디오가 처한 오늘날의 신세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디오 방송에 대한 이야기는 후반부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분량은 적어도 놀랍기만 하다. 독일의 나치가 국민 라디오를 만들어 보급하면서 나치의 선전선동을 전파하는 데 써먹었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그랬던 독일이 패전 후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FM방송을 발전시켜 나가고 그것이 지방분권이라는 문제와 연결되는 부분 역시 충격적이다.

앳된 군인이 두 손으로 감싼 라디오는 ‘러시아 303’으로 추정된다. ⓒ‘체르노빌’화면 갈무리(욎쪽) / 러시아 303호. ⓒ김형호(오른쪽)

『라디오 탐심』은 이런 식으로 과거의 역사가 오늘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주는 부분이 많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라디오를 빌려서 술술 풀려나가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이 후반부의 이야기, 라디오를 이용한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펼쳐졌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 『라디오 키즈의 탄생』이다.


『라디오 키즈의 탄생』은 부제가 “금성사 A-501 라디오를 둘러싼 사회문화사”라고 되어있다. 때문에 책을 처음 잡았을 때 1959년 무렵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1970년대 중반까지를 다룬다. 이 시기까지는 아직 TV보다 라디오가 대중문화의 훨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때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책 제목과 부제 모두 이 책을 잘 설명하는 것 같지가 않다. 이 책은 훨씬 더 심각하기도 하고, 훨씬 더 재미있기도 하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생산된 라디오. 골드스타 A-50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라디오’는 금성사의 ‘A-501’로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은 그 점부터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작한다. ‘국산’이라는 선전물이 필요했던 정권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정부 정책을 전파해야 하는 권력의 필요에 따라 성공적인 상품이 된 과정이 잘 설명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라디오를 선택하고 이것을 농어촌에 보급했다. 문맹률, 특히 한자라는 걸림돌이 있던 시대에 말로 정책을 전달할 수 있는 라디오는 진짜 소중한 전파 수단이었던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라디오를 직접 만들기 시작한 ‘라디오 보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더불어 추억의 세운상가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은 용산의 전자상가만 알고 있기 십상이겠지만 1980년대까지 전자상가 하면 종로의 세운상가였다. 세운상가와 라디오 보이에 대한 이야기는 정권의 목적에 따라 진행된 일들이 개개인에게는 어떤 영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책은 시대의 흐름이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프레임 안으로 집어넣고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발전’하게 되는지를 라디오를 통해서 알게 해준다.


나도 어린이잡지의 라디오 조립 키트를 만들어보았던 기억이 갑작스레 돌아왔다. 두 권의 라디오 책이 옛 추억을 하염없이 불러일으키니, 오늘은 3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이문영_역사작가, 소설가,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2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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