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독서 Jul 20. 2022

조부모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그림책 육아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손과 많은 경험이 필요한지, 그 녹녹치 않음을 뜻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 통계청이 발표한 올 1월 출생아 수는 작년보다 11.6퍼센트나 줄었다고 한다. 이런 발표가 있을 때마다 요즘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본다. 경제적인 어려움,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 독박 육아 등 어쩌면 요즘 젊은이들은 언니나 오빠가 조카를 키우는 걸 자주 보지 못하고, 이웃에서도 아이 키우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에 출산과 육아를 더 힘들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여섯 엄마가 일 년 동안 품앗이로 둘째 아이와 또래 친구들 유치원 수업을 했다. 아이 여섯, 엄마 선생님 여섯, 교실도 여섯! 나름 재미도 있고 모두의 만족도도 높았기에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품앗이 방과 후 수업 활동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계속됐다. 그때 우리 엄마들은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 손주들 유치원 품앗이도 해보면 어떨까 얘기했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고, 여섯 중 둘은 결혼도 했지만 아직 아이는 없고 사는 곳도 가깝지 않아 할머니 품앗이 유치원은 할 수 없다. 가끔 만나면 그런 것이 아쉽다 하면서도 각자 자신의 손주들을 키워주는 문제에 대해 얘기하곤 한다. 


밀접하게 생각 나누는 그림책의 힘

요즘 조부모의 양육 참여가 많아지면서 초등학교엔 학부모 회의뿐만 아니라 조부모 회의도 있다고 들었다. 서울시복지재단에서는 제2의 육아 인생을 사는 조부모들을 위해 교육 정보를 지원하고 나누는 ‘조부모의 수다 살롱’을 진행하기도 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육아와 교육의 일부분을 맡게 된다면 아이와 부모에게 좋은 점이 많을 것 같은데, 조부모 입장에서는 어려움도 많을 거다. 그래서 국가 사회적 차원에서 조부모 교육을 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고, 조부모들은 동아리를 만들어 함께 공부하고 어려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부모 동아리는 특히 그림책을 중심으로 활동하면 좋을 것 같은데, 손주들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살피고 위로받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어린이의 마음과 생각을 어른들과 밀접하게 나눌 수 있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 좋은 그림책은 마음을 움직이고 사고의 세계를 풍부하게 만들며, 예술적 감각을 키워주고 삶의 의미와 질을 향상시킨다. 

생후 6개월 무렵부터 볼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형태의 그림책이 있고, 만 2세 무렵 어린이가 물건이나 사물, 동물, 식물의 이름과 쓰임, 역할 같은 것을 익힐 수 있는 간단하고 선명한 그림책도 많다. 좀더 자라면 글과 그림을 구별할 수 있는데, 어린이의 생활이나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책도 볼 수 있다. 물론 어린이들이 보는 그림책은 어른과 함께 시작해야 하고, 글씨를 읽을 수 있는 연령대가 되어도 어른이 읽어주는 것이 좋다. 글자를 읽는 능력보다 바른 언어 구사력과 의미 이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시리동동 거미동동』(권윤덕 그림 / 제주도꼬리따기노래 / 창비)을 읽어준다면, 

“시리동동 거미동동 / 왕거미 거미줄은 하얘 / 하얀 것은 토끼 / 토끼는 난다 / 

나는 것은 까마귀 / 까마귀는 검다 / 검은 것은 바위 / 바위는 높다 / 

높은 것은 하늘 / 하늘은 푸르다 / 푸른 것은 바다 / 바다는 깊다 / 깊은 것은 / 엄마의 마음”

처럼 어른들은 말꼬리를 이어가는 책이란 걸 알기 때문에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박자를 맞춰 노래하듯 읽어줄 수 있다. 또 글자에 담긴 의미를 소리의 강약이나 알맞은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읽어주게 된다. 어른이 책을 읽어주는 동안 아이는 귀로 소리를 들으며 눈으로 그림을 살핀다. 그래서 혼자 글자 위주로 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많은 걸 느끼고 습득할 수 있다. 

ⓒ창비(『시리동동 거미동동』)

여러 번 읽으며 발견하기

그림책은 그림 속에 담긴 풍부한 장치와 의미 때문에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 많다. 그래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으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 한 권의 책을 수십 번 읽어도 괜찮다. 그때마다 다른 느낌과 깨달음이 올 수도 있다. 


『터널』(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 논장)의 표지엔 어떤 여자아이가 책을 바닥에 두고 터널 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그림이 보인다. 표지를 넘기면 왼쪽 면지는 아라베스크 문양 같은 벽지와 책 한 권이, 오른쪽 면지는 벽돌로 된 벽 그림이 있다. 

책 내용은, 어느 마을에 비슷한 데가 하나도 없는 오빠와 동생이 있다. 마주치기만 하면 티격태격 다툰다. 어느 날, 오빠와 동생은 엄마에게 쫓겨나며 사이좋게 놀다 오란 얘기를 들었지만 같이 놀기 싫었다. 오빠는 혼자 터널 안으로 사라졌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동생은 오빠를 찾아 터널로 들어간다. 으스스한 터널을 지나니 울창한 숲이 나왔다. 동생은 그곳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오빠를 발견한다. 동생은 차갑게 굳은 오빠를 껴안고 운다. 어느새 돌은 오빠로 변해서 “네가 와줄 줄 알았어” 하며 고마워한다. 

마지막 면지 그림은 여전히 벽지와 벽돌 그림으로 나뉘어 있지만, 오른쪽 면지에 책과 축구공이 나란히 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처음 책을 읽을 때 내용 안에 있는 그림 속 복선이 있는 소품들과 변화들을 다 찾기 어렵다. 몇 번 읽으면서 작은 소품들과 선이 보이고 그것들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논장(『터널』

『파도야 놀자』(이수지 글·그림 / 비룡소) 같이 글자 없는 그림책도 그림 속 엄마와 아이, 갈매기, 파도의 모습과 위치, 색의 변화가 어떤지를 알게 되면 훨씬 더 재미있다. 그러려면 여러 번 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싹 틔우고 자라도록 돕는 이야기들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야 할 나이가 되면 차츰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게 되는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이 유용하다. 현실적인 가족과 친구, 모험 이야기는 간접 경험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사회생활과 교과 수업 이해에 필요한 감정과 언어를 넉넉히 갖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좀더 자라면 철학적인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어른이라 해도 대답하기 어렵거나 설명이 곤란한 문제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우리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그림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외할머니 방 옆에 있던 커다란 호두나무와 방문을 열면 보이던 산자락, 울타리 너머 보이던 시냇물, 그리고 빨래하던 할머니 앞으로 둥실둥실 떠내려오던 나무 상자. 그 상자 안에는 “아앙, 아앙~” 울어대던 아기! 

우리 집에 자주 놀러오던 손님이 “너는 다리 아래에서 주워온 아이다. 네 진짜 엄마는 지금 청도 다리 밑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며 놀렸다. 그게 어찌나 서러웠는지 마당에서 엉엉 울었다. 그때 마침 외할머니가 오셔서 내 얘길 듣고, 나를 쓰다듬으시며 가슴 두근거릴 비밀 얘기를 들려주셨다. 

어떤 날, 빨래를 하려고 집 앞 냇가에 갔는데 애기 울음소리가 들려서 보니 나무 상자가 떠내려오더라는 것이었다. 얼른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상자 쪽으로 가보니 아기가 있었다고. 그런데 그 아기는 내가 아니라 우리 언니라며, 비밀을 지켜달라고 하셨다. 언니가 그 사실을 알면 집을 나갈지도 모르니 꼭 비밀을 지켜야 한다며….

내 눈물은 쏙 들어가 버렸고 나는 커다란 비밀을 안고 살아야 했다. 더 자라서 언니가 나보다 엄마를 훨씬 더 닮은 걸 깨달았을 때는 외할머니가 얼마나 슬기롭게 나를 위로하고 가르쳤는지도 알게 됐다. 엄마는 우는 나에게 “고만 울어~” 하고 말았지만, 할머니는 엄마보다 훨씬 풍부한 경험이 있었기에 지혜롭게, 50여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얘기를 만들 수 있었을 거다. 


그림책이 없던 시절, 할머니의 이야기는 나를 충분히 위로해주었고, 당시엔 몰랐지만 자존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도왔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도 탄생과 삶과 죽음에 대해 걱정하고 궁금해하는 시기가 온다. 그걸 설명하고 보여준다는 건 어른이라 해도 어려울 것이다. 그림책은 그걸 도울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책들이 갖고 있는 주제 이상을 그림책은 갖고 있다. 아픔과 고통,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화와 슬픔, 용기와 비겁, 후회와 반성…. 그렇기 때문에 그림책은 어느 연령대든 나이와 필요에 따라 찾고 선택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나는 생명이에요』『나는 죽음이에요』(엘리자베스 헬란 라슨 글 / 마린 슈나이더 그림 / 마루벌)를 아이들과 읽는다면 생명과 죽음에 대해 어렵지 않게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엄마가 알을 낳았대!』 『나는 여자, 내 동생은 남자』 『너의 몸을 사랑하는 방법』등 성(性)을 다룬 그림책들도 연령에 따라 찾아볼 수 있다. 

ⓒ마루벌(『나는 생명이에요』)
ⓒ마루벌(『나는 죽음이에요』)

내가 손주들을 돌보다가 어떤 문제에 맞닥뜨릴 때 우리 외할머니처럼 재밌는 얘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못 할 거다. 대신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림책을 많이 읽어줄 수 있다. 아이 교육이란 뭔가를 알려주고 가르친다는 의미보다 그 안에 있는 것이 싹을 틔우고 자라도록 돕는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림책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해낼 수 있다. 그래서 조부모가 육아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림책 공부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국에 조부모 그림책 동아리가 많이 생기고, 젊은 부부들이 육아 걱정을 덜어낼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그림책들은 아이를 키우기 위한 수백 명이 사는 한 마을, 어쩌면 온 세계를 끌어올지도 모른다.


배홍숙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연구실장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작가의 이전글 밤바다로 해루질 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