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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Jul 22. 2022

일상의 찬란한 선물, 아빠의 그림책 육아법

처음 아빠가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몇 초간 멍한 채 굳어있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아빠가 된다고? 아빠가 되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과연 아빠 노릇을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기쁨을 압도했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와 친밀한 시간을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나의 성장기. 선원이던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하루나 이틀 집으로 돌아왔고, 말이 거의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서로 마주칠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그렇게 내게 아버지는 곁에 없거나 말이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다. ‘아버지 됨’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친밀한 부성애를 누릴 기회가 없었던 내가 아버지 되기를 두려워한 건. 

아버지가 특별히 잘못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바닷바람과 싸워가며 여덟 식구 먹여 살리느라 다른 여유가 있었을까. 그 시대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지 않았을까. 지금이라고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림책부터 시작한 책 읽어주기 

나라고 별 수 있으랴. 야근을 수시로 했고,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업무 일정을 맞추기 위해 출근하거나 일을 싸들고 귀가하곤 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도 했지만, 어쩌다 쉬는 날이거나 마음이 내킬 때 선심 쓰듯 읽어주곤 했다. 아내는 독박 육아로 지쳐갔고 아이들은 아빠에게서 멀어져갔다. 문제의식을 느낄 즈음, 나 자신도 어릴 적 곁에 없고 말이 없던 아버지처럼 되어있었다. 다시 두려움이 몰려왔다. 우리 아이들도 나처럼 아빠와 친밀한 관계나 깊은 유대감을 누리지 못하고 자라겠구나. 위기의식이 죽비처럼 전신을 강타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가까이에 책이 있었다. 그래, 일단 책이라도 제대로 읽어주자. 야근이 잦은 내겐 그게 쉽고 가능성 있어 보였다. 아이들이 잠들 무렵 퇴근하더라도 책은 읽어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재밌어하는 그림책부터 시작했다. 첫째가 일곱 살, 둘째가 네 살이었다. 첫째는 일찌감치 혼자 책을 읽을 줄 알았는데도 아빠가 읽어주는 그 시간을 유별난 놀이 시간마냥 좋아하고 반겼다. 아직 읽지 못하는 둘째는 아빠가 곁에서 그림을 보여주면서 책을 읽어주는 그 시간을 즐거워했다. 잠들기 전에는 아빠가 어디에서든 달려와 책을 펴들고는 흥얼흥얼 신나는 모험 이야기, 낭창낭창 짜릿한 환상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까. 밤마다 머리맡에서 책 읽어주는 아빠 목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시간을 두 아이는 정말 행복해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몇 해를 이어가다 14년째 아빠의 책 읽어주기는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이야기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해한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대는 직장과 업무 여건을 고려했을 때 ‘잠들기 전 15분’이 최상이었다. 책을 읽어주다 보니 모자라지도 길지도 않은 15분 읽기로 정착되어갔다. 때로 상황에 따라 20분, 30분, 심지어 1시간 넘게 읽어주기도 했고, 몸이 안 좋거나 피곤할 땐 3분, 5분 정도로 짧게 읽어주기도 했다. 

읽어줄 땐 최대한 등장인물(혹은 동물) 캐릭터에 맞춰 목소리 굵기와 높낮이를 바꿔가면서 읽었다. 곰과 여우가 함께 나오는 장면이라면 각각 어울리는 목소리 톤이 서로 다르지 않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름의 ‘목소리 연기’를 한 셈이다. 책 내용에 따라 몸동작을 보태기도 했다. 그렇게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읽어주는 걸 아이들은 좋아했다. 

온 가족이 여행을 갈 땐,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나 여전히 읽어주던 책을 몰래 챙겨가서 잠잘 시간에 깜짝 이벤트로 읽어주기도 했다. 그때 아이들은 흥분으로 숭어처럼 팔딱팔딱 뛰며 좋아했고, 출근 부담도 등교 부담도 없기에 내가 지칠 때까지 길고 오래 읽어주었다. 

아이들이 자라가면서 자연스레 그림이 줄어들고 글밥이 많아지는 책으로 넘어갔는데, 200쪽 안팎의 책은 읽어주기가 끝나면 ‘책거리 이벤트’를 했다. 읽어준 작품이 영화로 나왔으면 함께 영화를 감상했는데 아이들은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며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책방 나들이를 계획하여 아이들이 각자 사고 싶은 책을 가져오면 어떤 책이든 아빠가 사주는 이벤트도 했다. 


언젠가 두 주가 넘는 해외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그 즈음엔, 두 주 넘게 아이들 잠자리에서 책을 못 읽어준다 생각하니 내가 더 서운하고 아쉬워졌다. 온갖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찾아낸 방법은 ‘녹음’이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둘째가 1학년이었는데, 당시 읽어주던 책을 아이들 몰래 하루 분량씩 녹음하여 출장 전날 아내에게 건넸다. 아이들이 곁에 없는 아빠의 책 읽어주는 목소리를 듣다가 아빠가 보고 싶다며 펑펑 울었다는 건 이젠 웃음꽃 피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책, 특히 고전 이야기책을 우선하여 읽어주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누구에게나 유익한, 검증된 작품이 고전 아닌가. 초등 시기에 읽어준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나니아 연대기』(전7권) 『15소년 표류기』 『메리 포핀스』 『피터 팬』 『로빈슨 크루소』 등이 대표적이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칼데콧상 선정위원이자 뉴욕대 독서학 교수였던 버니스 E. 컬리넌 박사는 “아이들은 이야기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해한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의 성장기를 함께한 나로선 그 말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함께 읽기 추천 그림책 

특별히 아이들이 어릴 적 좋아하고 즐기던 그림책 가운데 나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지고 읽고 또 읽어주어도 지루하지 않았던 몇 권을 추천한다. 


『누구야 누구』(심조원 글 / 권혁도 그림 / 보리)는 한국적 세밀화풍의 동물 그림만 보면서 책장을 넘겨도 눈과 마음이 함께 즐거워지는 책이다. 읽는 아빠도 듣는 아이도 덩달아 흥겨워지는 이 책은, 리듬감 있는 문장에 담긴 소리언어(의성어)와 몸짓언어(의태어)를 아이들이 자연스럽고 즐겁게 익힐 수 있다. 페이지마다 동물 꼬리가 숨은그림찾기 하듯 나오는데, 부분을 통해 전체를 상상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꼬리 주인을 빨리 찾아내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이 기분 좋은 흥분으로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다. 

ⓒ보리(『누구야 누구』)


『돼지책』(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 웅진주니어)은 집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불러대는 아빠와 두 아들이 돼지로 변하는 장면이 압권인 그림책이다. 그렇게 돼지 셋만 남은 집은 그야말로 돼지우리가 되어간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은 온 가족이 좋아했는데, 간결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영화 스틸컷 같은 독보적인 그림이 아이들을 사로잡는다. 아이들에게 그림이 얼마나 강렬한 메시지가 될 수 있는지 이만큼 생생히 보여주고 자극하는 책은 흔치 않을 듯싶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다 읽고 나서 책 표지 그림을 (특별히 아빠가!) 꼭 다시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보면 비로소 이유를 알게 된다. 

ⓒ웅진주니어(『돼지책』)


아이들에게 읽어준 그림책 중 『저만 알던 거인』(오스카 와일드 글 / 장성란 그림 / 분도출판사)도 기억에 남아있는데, 예상 못한 반전이 숨겨진 매력적인 책이다. 자기만 아는 거인이 자신의 정원에서 신나게 뛰놀던 아이들을 쫓아내고 높은 담을 쌓아올리고 스스로 갇힌 채 긴긴 겨울을 살아간다는 이 이야기는 어른을 위한 우화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친구나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일깨워주는데, 우리 집 아이들은 내용은 물론이고 그림 또한 몹시 좋아했다. 이 책과 함께 읽어준 『티코와 황금날개』(레오 리오니 글·그림 / 분도출판사)는 날개 없는 작은 새 티코 이야기와 함께 그림이 인상적인 책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면 황금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다 보면 때로 아이들보다 읽어주는 자신이 더 신나고 행복으로 차오르는 순간이 있다. 일상 가운데 찾아오는 그 찬란한 선물은 세상의 모든 아빠들을 찾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 가만, 그런데 왜 굳이 ‘아빠’가 읽어줘야 하냐고 물으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물음엔 우리 아이들이 들려준 말로 답을 대신하련다. 첫째가 열아홉, 둘째가 열여섯 살 때 한 말이다. 


“그냥 아빠가 읽어주는 게 좋았어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빠가 책을 읽어주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서로 어색하거나 서먹해질 일은 없을 거 같아요.”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도 아빠하고 보낸 시간이 추억으로 남잖아요. 그런 시간 덕분에 아빠랑 좀더 친해진 거 같고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것 같아요. 그 시간은 추억으로 오래 남을 거 같아요.”


옥명호_『아빠가 책을 읽어줄 때 생기는 일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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