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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Sep 02. 2022

농부 달력

심고 가꾸고 거두는 계절의 지혜

농부 달력

김선진 글·그림 / 56쪽 / 14,000원 / 웅진주니어



『농부 달력』은 시골 어딘가에 계신 듯한 농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두 분이 사부작사부작 1년 동안 농사짓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그림책입니다. 수십 년 계절을 정직히 살아낸 농부 부부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종자 씨의 종류, 작물의 성장과 절기별 날씨의 변화, 계절마다 달라지는 논과 밭의 모습, 제철 음식, 농가의 살림살이 등을 세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자식 사랑, 이웃 사랑, 동물 사랑, 노부부의 사랑 그리고 작은 벌레까지도 생명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따뜻하게 볼 수 있고 계절마다 펼쳐보면 좋을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책의 시작은 고라니, 까치와 나누며 더불어 지내는 겨울입니다. 겨울다운 겨울이 땅도 사람도 단단하고 건강하게 농사를 준비하는 시작점이라 생각했습니다. 농부만이 느끼는 봄기운이 올라오면 읍내에 나가 몸단장도 하고, 이웃 마을 사람들도 만나 안부 인사와 함께 새로운 농사 정보도 얻습니다. 또 굽은 허리와 시린 손 뼈마디를 치료하러 병원도 들릅니다. 봄나물이 올라올 때쯤이면 농부들은 씨앗 종자들도 점검하고 농사에 필요한 비료와 비닐 같은 것도 미리미리 준비합니다. 그리고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밭을 갈고 서둘러 파종을 합니다. 심어둔 씨앗이 연둣빛 새순을 틔우고 모종들이 제자리를 찾으면 모든 것이 짙고 달아 지는 여름이 옵니다. 자연이 준만큼 적당히 갖는 가을을 지나 함께 나누며 보내는 겨울을 보내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한 템포 쉰 후 다시 앞장을 펼치면 사계절을 돌아 다시 부지런한 농촌의 순환을 볼 수 있습니다. 


“심고 가꾸고 거둬들이는 데는 다 각자의 때가 있다”라는 책 속의 문장이 농사의 순환을 알고 움직이는 농부만의 달력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농부에게 ‘때’는 정확히 규정지어 보이는 숫자가 아니라 수많은 농사의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익힌 농부만의 감각 시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진달래 꽃술이 많이 달렸으니 올해는 풍년이다”라거나 “개미가 한 줄로 줄 지어 가면 비가 온다.” “거미줄에 이슬이 맺히면 거둬들일 때다.” 그리고 “겨울이 추워야 다음 해 농사가 잘된다”와 같은 농부만의 개념으로 풀어낸 농사의 말들은 재미있는 낱말 풀이 같기도 하고 통계적이며 과학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문장들에는 농부가 수많은 계절을 그 계절대로 살아내며 터득한 삶의 철학과 지혜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책을 기획할 때 숫자와 날짜, 자동화 기계를 최대한 넣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잡았습니다. 자유자재로 기계를 다루며 농사짓는 스마트한 젊은 농부들도 있지만 제가 보여드리고 싶었던 농부의 모습은 날짜를 정확히 보지 않아도 농사 경력만큼 쌓인 지혜를 달력 삼아 해오던 대로 일하고 몸으로 행하는 노동의 가치를 보여주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이런 모습들이 근 미래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초반 더미에는 밥상 장면이 없고 추수가 끝난 겨울 논밭뿐이었는데요. 1년 동안 농사짓느라 고생한 농부도 추수한 곡식과 작물들로 배부르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편집자의 의견이 좋아 반영을 했습니다. 모든 농사일이 끝난 후 풍성한 밥상으로 마무리한 것이 농사의 본질에 더 가까워진 듯해 잘 고쳐 넣은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한평생 농부의 계절을 보고 자란 제게 시골의 기억은 청각과 후각의 모습으로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여러 종자들과 농기구들이 섞인 창고의 냄새, 상쾌한 봄비 냄새, 멀리서 다가오는 소나기 소리, 비가 툭 한 방울 떨어지고 곧이어 투둑 투두둑 벼 잎에 떨어지고 점점 커지는 빗소리, 계속 듣다 보면 소리조차 없어지는 장맛비, 분주한 잠자리 날개 소리, 통통통 멀어져 가는 경운기 소리, 황금빛 벼가 바다처럼 쏴아아 하고 물결치는 소리, 흙냄새, 바람 냄새, 눈 냄새. 바리바리 빈 공간 없이 채워져 올라온 시골의 택배에서는 이 모든 사계절의 감각들이 훅 쏟아져 나옵니다. 제가 느낀 이런 소리와 냄새가 책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도 가닿길 바랍니다. 


농부들은 알고 있습니다. 강풍이 불어 꽃잎이 후드득 다 떨어져도 금세 거기에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당장은 좌절이라 해도 열매를 맺게 되고 못난 열매라도 달게 맛볼 수 있습니다. 벌레가 먼저 왔다면 벌레 몫만큼 떼어주고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조급해 하지 않으며 천천히 기다리고 맡기는 마음, 자연이 준 것을 자연에게 되돌려주는 마음, 인간과 자연이 함께하는 균형 잡힌 삶을 『농부 달력』을 통해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농부의 마음을 풀 내음 가득 담아 전해드립니다. 항상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깃드시길 기원합니다. 



김선진 작가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관찰하고 그림책으로 옮깁니다. 첫 번째 그림책으로 흐르는 시간 속 한 공간을 공유한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그린 『나의 작은집』이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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