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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Nov 07. 2022

그림책과 포스트휴먼

그림책 깊이 읽기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사이다의 그림책 『풀친구』의 마지막 부분에서 잔디는 친구들의 행방을 묻는다. 골프장 개발로 잔디는 머리가 똑같이 깎였고 친구들은 사라졌다. 근심 어린 목소리다. 똥을 나눠주고 놀이를 함께하는 친구들이 없으면 잔디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놀랍게도 ‘풀’은 움직이고 있다. 김수영의 시에서처럼 강한 바람에 맞서 눕고 일어나는 대응의 몸짓과는 다르다. 홀씨는 조용하지만 주체적으로 날아간다. 이 홀씨들은 면지로 퍼지고, 다시 표지에도 묻어난다.

이 장면은 작고 조용한 활기를 보여주며 사람보다 뛰어난 잔디의 힘을 표현한다. 인류세의 시대에는 생물이 스스로 재생할 수 있는 공간, 즉 레퓨지아를 확보해야 하는데 이러한 레퓨지아의 주인공이 바로 홀씨다. 어쩌면 지구의 마지막 시간에 설 이는 인간종이 아니라 잔디 풀이 될 것이다. 『풀친구』는 잔디의 회고담이고, 물질들이 재편된 세계의 창세기일지 모르겠다.


인간중심주의를 돌아보다

우리에게 속속 도착하는 메시지들은, 앞으로 몇십 년 안에 고갈될 자원의 양을 보여주는 그래픽, 사막화된 땅의 면적과 지구의 온도에 대한 숫자들, 고난을 당하는 여러 생물의 모습, 멸종위기종의 증가를 보고하는 자료들을 첨부하고 있다. 좀더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들은 이미 넘쳐나 녹고 있는 얼음 위에 고립된 북극곰, 어마어마한 양의 플라스틱이 떠다니는 바다, 썩지 않는 쓰레기들의 창궐을 보여준다. 대중적 경고의 메시지는 현실화되었다. 올해 들어 신문 1면을 장식한 기후 위기의 보도사진은 몽골발 북경의 황사, 일본의 홍수, 북미의 폭염과 대형 화재 등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거대한 팬데믹의 지구를 ‘이미’ 살고 있다.

염세적 전망을 벗어나기에 늦지 않았다. 과거의 삶을 단절시키고 총체적인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시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핵심에 ‘인간중심주의’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포스트-휴먼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방향과 바람이 혼재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을 확장시켜줄 것을 기대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가진 우월한 지위와 권력이 다른 종, 대상들에 끼친 영향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행위와 근간이 되는 사고방식에 대한 반성이다.


팬데믹이 시작될 즈음에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미술작품은 김세진의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전령(들) Messenger(s)」(2019)이다. 이는 우주 개 라이카를 디지털로 부활시킨 작품이다. 라이카는 최초의 우주비행 동물로 사람보다 앞서 우주를 ‘개척한’ 생명체이며 냉전시대 우주개발 경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떠돌이 유기견이던 라이카는 우주선 탑승 7시간 만에 고열로 사망한다. 우주선의 불완전함과 라이카의 죽음은 개발 당시부터 예견된 사실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숨겼던, 혹은 주목하지 않았던 사실들이 50년 만에 드러났다. 이 작품은 3D기술로 꼼꼼하게 라이카를 부활시켜 일종의 ‘기념비’를 만들었는데, 눈앞에 생생하게 존재하는 듯한 라이카의 모습은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제작하는 이, 호모파베르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종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기술이 무엇을 재료로 삼아 무엇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질문을 포스트휴먼 상상에 포함하여야 한다. 이때 물리적 세계를 포착하고 감지하여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을 직조하는 이들이 제작자-작가들이다. 그것이 전령사(메신저)의 일이기도 하다.


기후 위기 시대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노력, 즉 사유와 정신적 우위성에 대해 반대하고 물질, 객체, 자연, 비인간의 행위와 역능을 조명하는 철학이 부상한다. 이때 인간종은 어떠한 이해나 해석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물질과 자연의 ‘행위 능력’를 감지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사유와 행위와는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를 가늠해야 한다. 이에 대해 『생동하는 물질』을 쓴 제인 베넷은 “그 꽃가루의 배열, 다른 경우에는 지극히 평범했을, 대량생산된 그 플라스틱 병마개의 있을 수 없는 독특성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앎”을 묘사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비인격적 정동의 현전을 감지할 수 있으려면 그것에 사로잡힐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들의 전령사

김동수의 그림책 『감기 걸린 날』(보림)에는 엄마가 장만해준 점퍼에서 삐져나온 깃털에 사로잡힌 아이가 등장한다. ‘나’의 꿈에서는(어린이책에서는 자주 보지 못했던) 제법 기괴한 이미지가 이어진다. 온몸에 털이 빠진 끝도 없는 오리 떼가 ‘나’를 향해 몰려드는 것이다. 아이는 어떠한 말로 오리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는 대신, 오리의 요청을 성실하게 들어준다. 점퍼의 털을 하나하나 뽑아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오리 떼 하나하나에게 다시 심어주는, 지루한 과정에 대한 반복 묘사가 이어진다.

ⓒ보림(『감기 걸린 날』)

 “열심히 열심히” “마지막 한 마리까지” 이 과정은 아이가 오리와 함께 놀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점퍼에서 삐죽 나온 깃털은 서사를 지배하는 사물이다. ‘나’는 왜 그 사물을 오래 생각하다 잠이 들었을까? 주인공 ‘나’는 작은 조각에 불과한 것에서 세계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제인 베넷에 의하면 이러한 순간은 “우연하게 일어나며, 주체의 예기적 기민성”으로만 포착할 수 있다.

ⓒ보림(『감기 걸린 날』)

오리 깃털을 매개로 보여준 김동수의 사물에 대한 감각은 『잘 가, 안녕』(보림)에서 길가에 버려진 동물 사체의 조각을 수거하는 할머니로 이어진다. 로드킬당한 동물의 터져 나온 내장, 사체의 조각들을 꿰매는 주인공(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의 재현은 또 역시 기괴하다. 할머니가 ‘(동물 사체라는) 사물의 조각’을 통해서 직관적으로 파악한 고통의 정동은 다시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며, “열심히 열심히” “마지막 한 마리까지” 모으려는 반복적 행위로 이어진다. 마지막엔 오리 떼가 (『감기 걸린 날』에서 오리 깃털을 단 그 오리일지도 모르는) 바느질 자국이 그대로 나있는 동물의 사체들을 운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들이 나아가는 물길에는 (도시에선 볼 수 없는) 연꽃이 도열해 피어있고, 새벽의 어스름한 빛을 받아 떠내려간다. 인간이 동물의 몸을 파괴했지만, 결코 바스라지지 않는 (영혼이 아닌) 사물들의 영원한 현시로 이어진다.


이미나의 『터널의 날들』(보림)에서 터널이라는 사물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창발하는 듯한 역동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포착되는 것은 콘크리트의 물질성이 이끼, 빛, 바람과 공기의 순환이라는 여러 요소들 속에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존재의 생기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이 안을 흘러 다니는 자동차, 오토바이, 버스와 터널 안 조명 불빛까지도 고정되지 않는 존재감을 동시다발로 뿜어내고 있다. 


이런 이미지 표현은 『나의 동네』(보림)에서도 이어지며 작가의 스타일을 만든다. 『나의 동네』는 우체부의 뒷모습을 따라가도록 구성되었는데, 이미나의 그림은 우체부라는 사람보다 그를 둘러싼 배경의 요소들에서 더 큰 에너지를 발견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사람보다 큰 존재로 드러나는 식물의 줄기와 잎에는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의 겹들, 잎맥의 모양이 자세히 보인다. 언제부터인지 그곳이 제자리인 양 존재하는 둥그런 모양의 의자와, 화분, 화단과 계단, 우체부가 힘겹게 끌고 올라가는 자전거의 표면은 사람, 식물의 그것과 차등되지 않고 표현된다. 

ⓒ보림(『나의 동네』)

원근을 파괴한 커다란 크기의 나비, 다람쥐와 파랑새, 동네 개와 고양이들은 다른 얼굴과 털의 질감, 색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유화 물감의 중량감과 더불어, 물감의 더께, 붓질이라는 회화의 물질 요소를 서사 안에 중요하게 표현해온 작가의 이미지 양식이다. 독자는 식물에 뒤덮여 녹슨 마을 입구의 지도, 그리고 건물의 잔해에 이르러서야 이곳이 이제는 없어진 어떤 곳임을 인지하게 된다. 마지막에 다다른 현장은 재개발을 위해 철거한 마을의 ‘폐허’가 아니다. 키만한 식물과 빨간 자동차라는 사물, 작은 고양이가 공존하는 풍경이다.

ⓒ보림(『나의 동네』)

물질에 대한 새로운 사유는 한편 새롭지 않기도 하다. 사물에 생기나 영혼을 감지해온 ‘애니미즘’은 예술, 제작의 오랜 역사 속에 함께했기 때문이다. 최근 인류학자들의 저작이나 예술계에서 다시 애니미즘이 주목받는 맥락도 눈여겨볼 만하다. 애니미즘과 관련해서 흥미롭게 떠올려본 것은 피아제의 아동 ‘물환론(애니미즘)’ 사고이다. 유아기에는 원시적 애니미즘이 작동하여, 온갖 작은 사물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구조주의 비평가인 토도로프도 당대 어린 시절의 이러한 감각에 주목했다. 언어가 아직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어로 재현될 수 없는 존재들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을 비춘다. 어린 전령사는 풀, 똥, 플라스틱 쓰레기, 유령은 물론 깃털과 구슬의 무게를 감지하고 전달하려 한다. 


소윤경의 『호텔 파라다이스』(문학동네)에는 구슬이 비추는 아른거림에서 개발 풍경의 폭력을 발견하는 소녀가 등장한다. 그곳에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착취한 식민지와 파괴된 공동체의 모습이 있다. 이명애의 『휴가』(모래알)는 소녀가 고양이 전령사와 함께 발견한 풍경을 우리에게 비춰준다. 노석미의 『냐옹이』(시공주니어)는 뭔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눈 맞추기를 포기하지 않는 소년과 고양이를 묘사한다. 백희나의 『나는 개다』(책읽는곰)에서 깊은 밤 개의 하울링에 반응하는 건 동동이 어린이뿐이다. 이미나 작가는 『나의 동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부터 영감받았음을 밝혀왔다. ‘잃어버린 것’은 추억이 아니라 동물, 식물, 사물을 지각하는 ‘어린 시절’의 역능일지 모른다. 어린 독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한윤아_시각예술기획자, 타이그레스 온 페이퍼 대표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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