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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Dec 26. 2022

지금을 만든 역사와 사람들을 찾아서

기획자 노트 - ‘너머학교 역사교실 그림책’ 시리즈

2021년 7월 8일 점심 무렵 깡깡이예술마을 안내소에서 『망치질하는 어머니들 깡깡이마을 역사 여행』을 그린 김민정 작가를 만났다. 전날 쏟아붓던 비는 그치고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 벽화가 있는 주상복합아파트부터 폭이 50센티미터도 안 되는 골목길, 오래되고 작지만 깔끔한 집들, 각종 부품이 가득한 공업사들 앞을 걸었다. 일 년이 지나 올해 7월 초 이 그림책이 세상에 나왔다. 너머학교의 다섯 번째 창작 역사 그림책이다. 


2019년 봄, 미소를 띤 듯 안 띤 듯 미묘한 표정과 먼 곳을 보는 깊은 눈매의 중년 여성을 그린 커다란 흑백 벽화를 보았다. 검색해보니 쇠락해가던 부산 영도 대평동 수리 조선소 마을이 다양한 예술 작품과 카페, 거리 박물관 등 예술마을로 새로워지고 있다는 기사와 이 과정을 담은 뉴스,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최초의 근대적 조선소가 세워진 곳이고 200여 공업사를 거치면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가장 인상적인 사실은 이 수리 조선소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일했다는 것이었다. 배 수리의 첫걸음은 표면에 생긴 녹과 따개비, 조개를 망치와 끌로 때리고 긁어내는 것이다. 강철 배를 망치로 때릴 때 깡깡 소리가 나서 이 일을 깡깡이질이라고 했고, 이 일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깡깡이 아지매라 불렀다. 거대한 배에 줄을 매단 널빤지에 앉거나 서서 수건을 쓰고 허리에 연장을 넣은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는 모습은 정말 무척 강렬했다.  

『망치질하는 어머니들 깡깡이마을 역사 여행』 중에서

기획안을 쓰기 위해 먼저 자료를 찾았다. 깡깡이마을 사업단에서 낸 마을의 역사와 산업, 문화 세 권의 책과 부산시를 연구한 『부산은 넓다』 등을 읽고 부산 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온라인 자료도 찾아보았다. 기획 의도와 줄거리, 스무 개 펼침면의 주요 장면을 담은 기획안이 만들어졌다. 글을 쓸 박진명 작가와 닿아 기획 의도를 설명하고 글 분량과 문장의 방향 등을 상의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깡깡이마을 재생사업에 깊이 관여한 친구의 도움이 컸다. 그 무렵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왔고 꽤 오래 애타게 초고를 기다렸다. 그림책이 처음이라던 김민정 작가는 여러 차례 답사를 하며 장면 구성과 수정, 채색까지 열정적으로 해주었다. 완성 그림을 가지고 출판사에 온 김 작가는 할머니가 깡깡이질로 떼어낸 따개비를 가져다 끓여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지난 시간이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하는 저릿한 느낌,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느끼기를 바라는 감각이다. 


너머학교의 첫 책은 『생각한다는 것』으로, 그 뒤 몇 해 동안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책 ‘너머학교 열린교실’ 시리즈를 여러 권 내어서 청소년책 출판사로 아는 독자들이 많다. 실은 출판사를 시작할 때부터 ‘너머학교 역사교실’이라 부르는 어린이 역사 그림책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었다. 어린이책을 만들면서 어렵지만 재미있는 분야가 어린이 지식 그림책, 특히 역사 그림책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온 시간과 현재, 우리가 사는 곳과 세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소재를 찾고, 그 소재에 담긴 사실들을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조직한 글과 그 사실의 강약을 살리면서 세밀하게 표현한 그림으로 보여주어 역사적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이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이다. 통사나 정치사가 아니라 독자가 많지 않을 수는 있다. 그래도 사람들을 움직여 지금의 우리를 만든 작고 사소한 것들의 역사,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 세계를 보는 눈이 더 풍부해질 것이라 믿는다. 동화적인 장치나 스토리를 가급적이면 넣지 않고 역사적 사실들을 다소 건조하게 들려주는 방식도 어린이 독자에게 깊고 다양한 글 읽기 경험을 하게 해줄 거라 생각한다. 


첫 책 『아마존에서 조선까지 고무 따라 역사 여행』은 기획부터 출간까지 3년이, 『조선에서 파리까지 편지 따라 역사 여행』『식탁에서 약국까지 설탕 따라 역사 여행』은 약 2년 반, 『세종로 1번지 경복궁 역사 여행』도 3년 반이 걸렸다. 스무 장면을 밀도 높게, 고증을 해가며 그려야 하니 장면 구성이 어렵고 수정도 많아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한 보상이 얼마일지 가늠하기가 어렵고, 작가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니 개인적인 사정들로 일이 미뤄지는 것은 이해해야만 했다. 책을 만든다기보다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일 같기도 하다. 최초의 여군 조종사 이야기 『하늘로 날아』는 기다리는 중 만난 귀한 책이었다.

『하늘로 날아』 중에서

지난 13년 동안 어린이 인구가 크게 줄었고 책을 보는 독자는 더 줄었음에도 다양하고 좋은 그림책들이 많이 나왔다. 세상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사람들과 사연들이 많다. 머릿속 구상이 그림책으로 탄생해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은 너무나 떨린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동안은 너머학교의 방식대로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 담아 보려 한다. 위험한 환경에서 임금은 적고 자주 다쳐도 함께 일하는 보람과 재미를 알았던 멋진 깡깡이 아지매들을 떠올리면서.  


김상미_너머학교 대표


이 콘텐츠는 <월간아침독서> 2022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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