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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Dec 23. 2022

특별하고 다정한 우리 곁의 할머니들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

구돌 지음 / 48쪽 / 14,000원 / 비룡소



저는 마음이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이리저리 밭은걸음으로 돌아다녔지요. 매일 지나치는 놀이터 정자에서 주무시는 할머니들에게 눈길을 돌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물음표가 뜹니다. 그것은 발걸음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할머니들 곁을 스치며 점점 느릿해집니다. ‘내가 못 보는 시간에 이 할머니들은 놀이터에서 무엇을 할까?’ 뒤이어 이런 느낌표가 떴지요. ‘내가 보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구나!’

이 그림책에는 청춘의 푸르름을 간직한 할머니들이 무려 일곱 분이나 나옵니다. 평범한 듯하지만 특별하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매우 다정하여 어려움에 처한 동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지요. 바로 우리 곁에 있는 할머니들 이야기입니다.


원래는 ‘여섯 할머니와 놀이터’라는 제목으로 더미북을 만들었습니다. 여성 서사에 관심이 생겨 다시 꺼낼 때까지 오 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살아온 경기도의 한 도시는 길과 산 빼고 모든 게 바뀌었는데요. 다시 꺼낸 더미북도 그렇게 뼈대만 두고 싹 바꾸었습니다. 그림책 속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도 점차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시장이 있던 자리에는 고층아파트가 올라가고요. 길 끝에 산이 솟아나고, 버드나무가 막 자라나던 논 옆에는 놀이터와 학교가 들어섰어요. 버드나무의 나무말은 ‘봄의 흥취’입니다. 화단에는 ‘젊은 날의 회상’이란 꽃말을 가진 꽃범의꼬리와 ‘동심’이란 꽃말을 가진 강아지풀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들과 함께 놀면서 궁리를 거듭했지요. 어떻게 하면 이 이야기를 독자들이 믿게 만들까!


“만약 내가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거예요!”

라는 그루의 대사는 제가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진짜 내가 보고 쓴 얘기라고 뻥을 좀 치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그림에서는 경계를 만들어 구분했습니다. 3D로 그려진 장면은 현실이자 현재이고, 2D로 그려진 장면은 판타지와 과거입니다. 고양이 그루의 이름은 ‘그루잠’에서 따왔는데요. 그루잠이란 ‘깨었다가 다시 든 잠’이란 우리말입니다. 속표지에서 그루는 그림자가 사라지는 시간인 정오에 잠에서 깨어납니다. 책이 열리며 호접몽을 상징하는 나비가 날아들고 책이 닫히며 나비는 책 밖으로 떠납니다. 이것이 그루가 꾼 꿈인지, 아니면 실제로 겪은 일인지 모호한 장치를 해놓았어요.

그러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최현경 편집자를 만나고 두 가지 설정이 추가되며 방향이 조금 바뀌게 되는데요. “할머니들이 재주로 무언가를 하는 사건이 추가되면 좋겠다”고 제안하셔서 동물학대범 사건을 넣으며 이야기는 현실 쪽에 더 발을 디디게 됩니다.


또 하나는 화자의 등장입니다. 저는 이 흥미로운 제안을 발전시켜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를 일곱 번째 할머니가 썼다는 설정을 덧붙였습니다. 앞표지를 보시면 펜과 노트를 들고 있지요. 구주부 할머니는 목격자이자 작가가 되는 셈입니다.

이 책에는 여러 목격자가 등장합니다. 검은 고양이는 과거 장면마다 노란 눈을 번쩍이며 할머니들을 지켜봅니다. 우리가 타인을 목격하는 순간들은 그저 어느 작은 조각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타인을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잖아요. 그러나 누군가를 아주 오랜 시간 지켜봐 온 애정 어린 시선은 그것을 조금은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검은 고양이는 그런 역할을 맡았습니다.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에서 일터가 세모 지붕인 까닭은 엄마의 일터가 떠올라서입니다. 20년간 미용실을 하셨던 엄마에게 그곳은 소중한 삶의 공간이었습니다. 할머니들에게도 일터란 그런 곳이었지요. 반대로 구주부 할머니에게는 집이 평생의 일터였고요. 그런 의미를 알았는지 같이 작업한 시다현 디자이너가 아무 말 없이 뒤표지 바코드에 세모 지붕을 씌워주었습니다. 또한 의성어와 의태어 느낌을 살려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해주었는데, 소리와 움직임에 맞춰 디자인된 글자들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부분은 “빙그르르”와 “야아오오옹!”입니다.


여름의 끝 무렵 원고는 제 손을 떠나더니, 멋진 하드커버를 달고 책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혹시 아시나요? 그때부터 작가와는 별개로 책의 생이 시작됩니다. 저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먼 곳을 돌아다니겠지요. 그러다 어떤 날은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누군가의 지나간 시간을 듣게 될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구돌 작가는 경계를 넘나드는 장기 여행자로 살다가 지금은 정착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기획하고 글을 쓴 『국경』으로 제6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로 제27회 황금도깨비상을 받았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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