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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의 예술적 가치와 제작 기술

그림책과 예술

by 행복한독서

그림책이란 무엇일까?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그 콘텐츠의 본질적 요소를 잘 알아야 한다. 문화라는 단어가 탄생되기 이전부터 인간은 자신의 의견과 지식을 타인과 후손에게 전달하고 싶어 했다. 시각물을 통한 서사가 담긴 작품은 기원전 1만 5000년 전 그려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라스코동굴이 최초라 여겨진다.

구두로 전달되는 정보는 장소와 시간의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기에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하지만 문장으로는 부족한 입체적 정보를 전하려고 그림을 곁들이며 효율적인 정보 전달을 이루어냈다. 인간은 기능적인 요소만으로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타고난 본능과 같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탄생한 그림의 예술적 가치가 높아진 진화의 시작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출발된 것이다. 문장 또한 텍스트가 지닌 의미를 좀더 효율적으로 즐겁게 마주할 수 있도록 발전해갔고 인쇄 기술의 등장으로 현재의 그림책 역사는 시작되었다.


복제예술 콘텐츠로서의 그림책

단도로 제작된 판화에, 손으로 채색되어 퀄리티가 균일하지 않은 컬러가 대입된 15세기 그림책을 현대 그림책 역사에서 살짝 분리해야 하는 이유는 그림책은 복제예술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CD 혹은 LP를 사용했고 현재는 MP3 음원으로 제공되는 형식이 대표적인 음악 세계 속 복제예술의 모습이다. 티켓을 구입하면 내가 어디에 살건 먼 이국땅에서 제작된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를 가까운 상영관에서 동등한 품질의 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 또한 공연이나 무대예술계의 복제예술 콘텐츠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림은 어떠한가. 제한된 기간과 화랑의 위치에 따라서 한 점의 원화를 감상하는 일은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하지만 그림책은 작가의 국가적 위치나 소속과는 무관하게 저작권이 있는 국가의 출판사를 통해 동등한 품질의 인쇄로 세계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림책은 시각예술 분야를 대표하는 복제예술 콘텐츠인 것이다.


19세기 말, 제작 단가의 문제로 제한적이긴 했지만 다색인쇄가 가능해 동등한 퀄리티의 에디션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점과 그림과 글의 독립적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랜돌프 칼데콧을 현대 그림책 역사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특히 1930년대 러시아에서 시작된 석판인쇄법을 보다 정교한 판형으로 제작해 합리적 가격의 다색인쇄를 이루어내고 그림책을 발표한 노엘 캐링턴의 퍼핀북스 그림책들은 ‘시각적 보는 즐거움’의 참 재미가 무엇인지 많은 독자들에게 입증했다.

펼친 면에 압도하듯 꽉 찬 그림이 등장하는 현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 시장의 효시이기도 하다. 그림책 판형의 선택과 편집디자인의 적합성이 독자에게 흥미롭고 즐거운 시각 경험을 선사하면서 상업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그림책작가의 길을 열어주었다.


한국 출판 역사와 예술적 가치의 그림책

베이비부머 세대는 1980년대 부모가 되어 두세 명의 자녀를 가지게 되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어린이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우리 교육 문화 콘텐츠는 미비한 수준이었다. 그림책 또한 작품의 질적 성장을 고민하기에는 양적 보급에 급급한 현실이었고 교육서로서 학습적 성과를 뒷받침하는 그림책 보급도 독자들에게 양적 충족을 만족시키기에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독자는 자녀와 아이를 위해 그림책을 구입하고 또한 자신의 문화적 체감 매체로서도 구입한다. 구입에는 ‘소장의 즐거움’이란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영화관에서 즐겁게 감상했던 작품을 오랫동안 곁에 두고 보려고 블루레이를 구입하거나 IPTV 소장 목록에 영구 보관 구입을 선택하는 행위는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보았던 그림책을 내 책꽂이에 고스란히 꼽아놓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는 감상 행위와 같은 의미다. 원래 소장용인 하드커버 에디션과 내용 확인을 위한 페이퍼백 버전이 따로 출간되는 그림책 시장이 해외에 오랫동안 자리한 이유도 그림책을 문화 예술적 가치로 바라보는 책 문화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교육서로서 그림책을 바라본 우리 시장은 그림책 제작의 단가를 높게 책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그림이 담긴 콘텐츠가 힘없는 겉표지로 마무리된 페이퍼백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국내 출판사에서는 외피를 생략한 하드커버 에디션을 출간하고 단가 절감 문제로 내지 지류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중학교를 진학하는 순간 그림책은 더 이상 내가 즐기는 문화 요소에서 사라지며 중고로 되팔거나 폐지로 전락해버렸다.


1988년 류재수 작가의 『백두산 이야기』(통나무)를 시작으로 다양한 판형과 격식을 갖춘 하드커버 형태와 원화를 정교하게 재현하기 위한 인쇄 방식과 지류 선택이 우리 그림책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림책 제작 환경의 성장과 함께 그림의 다채로운 형태와 다양한 글 형식이 담기며 독자들의 인식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그림책이 제공하는 학습적 성과만큼 정서적 감동을 주는 예술 체감 교육을 통한 창의력 발달이 아이들에게 무척 중요하며 어른들에겐 힐링서로 높은 가치가 있음을 알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다. 현재까지 이런 흐름은 매우 강하게 내려오고 있다. 이유는 4차 산업이라 불리는 AI시대를 맞이해 많은 단순직은 사라지고 창의력을 요구하는 직종만이 인력시장에서 살아남을 거라는 예측 때문이다.


새로운 종이책 제작 기술과 그림책 편집디자인

첨단 네트워크 시대를 맞이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술의 진화에 디지털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기존 아날로그 매체들은 뉴미디어와 함께 공생해오며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해왔다. 종이 그림책 제작 기술도 이에 속한다. 섀도 아트라 불리는 그림자 형식으로 종이를 오려 표현하는 기법을 많은 그림책작가들이 작품에 사용하기를 염원했지만 강도가 높은 동판을 이용해 원화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선 지극히 제한된 아웃라인을 이용해 만들거나 그나마 제작비의 한계로 출간을 포기해야 했다. 초기 레이저 커팅 기술은 종이 뒷면에 탄 자국이 남아있어 양쪽 페이지를 오가는 독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그림책에 대입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현재 놀라운 기술의 진보로 손으로 그리기 어려운 지점의 세밀화까지 디지털 원화를 통해 종이 오리기를 구현시켜 출간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독자의 독서 환경에 따라 그림자가 형성시키는 신비로운 형태의 변이는 태블릿 PC안에서는 도저히 구현하기 어려운 지점의 문학적 체감을 선사한다. 앙투안 기요페의 『리틀 맨』(보림)과 같이 새로운 기법을 차용한 작품들은 그동안 세밀히 표현하기에는 어려웠던 전쟁과 난민 같은 아픈 주제를 세련된 함축미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

보림-리틀맨.jpg ⓒ보림(『리틀 맨』)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오락거리가 디지털 바람을 타고 탄생될 때 많은 이들은 종이책 시장을 걱정했지만 이런 위기감은 새로운 발전의 발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과거 아이들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움직임과 이벤트성 오락거리를 제공하던 수많은 팝업북들도 더 이상 재미 중심으로 버티긴 어려워졌다. 이런 위기는 최근 디자인적 가치가 높고 인문학적 흥미가 높은 콘셉트로 기획 출간된 팝업북을 탄생시켰다.


마리옹 바타유의 『ABC 3D』(보림)는 유럽의 건축물과 가구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영감을 그림책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특히 다양한 색채와 이야기 서사를 의도적으로 배제시키고 문자가 지닌 조형적 균형감을 선보여 독자에게 원론적, 심미적 즐거움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보림(『ABC 3D』).jpg ⓒ보림(『ABC 3D』)

이선미 작가의 『귀신안녕』(글로연)은 글과 그림을 담는 그릇인 책이란 물성이 훌륭한 편집과 북 디자인 콘셉트로 이루어져야 하는 좋은 예시를 선보였다. 눈에 존재하지 않는 두려움의 매개체인 귀신을 그림책 소재로 다룬 이 책은 주인공의 상상에 존재하는 영적 존재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표지에 구상적 매개체를 등장시키지 않는 파격적 구성과 동시에 표제를 투명한 부분 코팅 기법으로 인쇄했다. 비스듬히 비추거나 손으로 만져야만 ‘귀신안녕’이란 제목이 인식된다. 존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귀신이란 매개체와 타이틀의 물성이 같은 것이다. 내지로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면 발이 사라져버린 귀신의 모습처럼 본문 텍스트의 서체들은 살포시 아래서부터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읽힘에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이 작품에 작가의 글과 그림이 정밀하게 계산된 편집디자인 콘셉트와 조율이 없었더라면 과연 이렇게 참신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글로연-귀신안녕.jpg ⓒ글로연(『귀신안녕』)

이런 그림책의 디자인적 완성도는 라이선스 출간에도 영향을 끼쳤다. 자신을 위한 소장으로 연결되는 그림책 애호가들 사이에서 원서를 선호하며 높은 가격 형성에도 불구하고 구입한다. 최근 출간된 소피 블랙올 작가의 『안녕, 나의 등대』(비룡소)는 오리지널 영문이 가진 서체의 뉘앙스와 특징, 부분 금박 인쇄를 하여 고전적이면서도 세련된 우아함을 유지한 디자인 콘셉트를 고스란히 한글판에 담아낸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비룡소-안녕나의등대.jpg ⓒ비룡소(『안녕, 나의 등대』)

짧은 시간 내 양적 성장을 일궈낸 우리 그림책 시장은 좀더 본질적으로 즐겁게 바라볼 수 있는 콘텐츠 문화로 성장하고 있다. 다양한 종이 그림책 제작 기술을 응용한 우리 작가의 작품과 글, 그림의 콘셉트에 접안한 북 디자인이 한 몸이 되어 미학적 아름다움을 선보이는 다양한 그림책들이 어린이 독자를 포함한 어른 독자들에게도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길 바란다.


류영선_일러스트레이터, 그림책·미술 평론가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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