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책 깊이 읽기
“이 장면 명장면이지? 마치 뭉크의 「절규」 같지 않니?”
“그러네요.”
“그림책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끝나 버렸네. 그러면 이제 압틴은 어떻게 되었을까?”
“뭘 어떻게 돼요. 쌤, 뻔하구만.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았겠죠. 그리고 가출했겠죠.”
아이들과의 대화는 이렇게 가출과 함께 불이 붙었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내내 인상을 펴지 않던 아이들은 뒷이야기를 묻는 말에 득달같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챔피언』(파얌 에브라히미 글 / 레자 달반드 그림 / 모래알)의 주인공 압틴은 스포츠 챔피언 집안에서 온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태어났다. 그러나 압틴은 작고 여린 아이이고 게다가 스포츠는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온 집안이 상징처럼 가지고 있는 얼굴의 점도 없다. 한마디로 집안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집안의 수치가 되어가고 있다. 압틴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은 그림 그리는 일이다. 압틴의 꿈은 멋진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압틴의 꿈을 이해할 수 없다. 무조건 스포츠 챔피언이 되는 것만이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는 일이다.
그림책에 나온 압틴의 처지를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하지만 죄다 부정적인 이야기들뿐이다. 마지막 장면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아이들은 드디어 압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다. 집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집 나와서 성공하고 들어가면 된다. 가출이 답이다.” “실력으로 어른들을 설득해야 한다.” 제법 어른스러운 해결책들도 나온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열띤 토론을 벌인다. 마음속에 품은 이야기들을 쏟아놓다 보면 그 이야기들이 거름이 되어 아이들은 스스로 문제를 찾고 스스로 자란다. 문제는 마음속 이야기들을 어디에서도 꺼내놓지 못하는 데에 있다.
알고 보니 내가 만난 친구들은 각 반에서 수업 시간에 꼴통 짓을 하며 수업을 방해하기로 유명한 아이들이었다. 중학교 2~3학년이었으니 이미 학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선생님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기에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심정으로 그림책 강좌를 부탁했다고 했다. 이렇게 따로 부른다는 것이 더 반항심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만났다.
열 명의 아이들이 둥글게 배열한 책상에 둘러앉았다. 앉았다기보다 대충 드러누웠다고 하는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림책을 읽기 시작하자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림책의 스토리에 몰입하고 등장인물이 처한 사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표정을 읽어내고, 등장인물에 공감하며 그림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질문까지 했다. ‘그림책의 힘’이다.
그림책은 함께 나누어야 할 깊은 생각을 담고 있어도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난다. 직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그림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그림들은 아름답거나 독특하거나 재미있다. 그리고 이미 책 읽는 것과 멀어진 친구들도 글자가 몇 자 없으니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 맘껏 그림책 수다를 떨다 보면 아이들의 생각은 한 뼘 더 자라고 아이들의 마음은 두 뼘 더 넓어진다.
그림책 세계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미 그림책은 단순한 어린이 교육용 매체에서 벗어난 지 오래고, 내포 독자를 지정하지 않은 채 전 세대를 향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0세에서 100세까지 그림책’을 지향하는 다양한 주제의 그림책들이 등장하고 그림책을 통해 삶의 위안을 얻는 어른들이 아주 많아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독 청소년들은 그림책에 익숙하지 않다. 그림책과 가까웠던 아동기는 이미 지났고, 그림책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만큼 삶이 여유롭지 않다. 쏟아지는 학업량에 시달리다 보니 그림책이건 문학책이건 가까이할 여유가 없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인간관계와 사회에 대해 구체적인 가치관을 세워가야 할 청소년기에 오히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청소년들에게 그림책을 건네고, 그림책이 걸어오는 이야기에 맘껏 생각을 펼치며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를 얻게 해주는 일은 아주 멋진 일이다. 왜 하필 그림책이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이렇다.
청소년들 대부분은 영상매체에 길들어있다. TV, 유튜브가 책보다 익숙한 세대다. 영상 매체는 필연적으로 이미지 읽기를 요구한다.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미지를 통해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미지 읽기는 우리 시대 문화를 읽어내는 필수적 능력이기도 하다. 그림책은 이 이미지 읽기를 연습하게 한다. 현대 그림책은 그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다. 글이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는 데 그치던 과거의 그림책과는 달리 그림과 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상징과 비유로 무장한 메시지가 그림 속에 담긴다. 독자는 이 그림을 읽어내며 이미지를 읽어내는 힘, 문화를 읽어내는 힘을 기를 수 있다.
또한 현대 그림책이 다루는 주제는 무척 다양하다. 책읽기와 멀어진 청소년들도 그림책에는 부담 없이 접근하여 깊이 있는 생각거리에 빠질 수 있다. 청소년기에 꼭 필요한 주제인 정체성 찾기에서 시작하여 청소년의 가장 큰 관심사인 사랑과 관계, 그 밖에 수많은 세상의 이치와 가치에 대해 그림책으로 이야기 나눌 수 있다. 그림책은 이제 날마다 한 걸음씩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인생의 쓴맛, 단맛, 짠맛, 새콤한 맛, 갖가지 맛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스스로 꿈을 찾아갈 권리가 있다. 아이나 청소년이나 어른이나 노인이나 인생의 어느 시기이든 원하는 삶을 살며, 하고 싶은 것을 꿈꿀 자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청소년기는 꿈을 찾아 어디로든 달려보기에 참 좋은 시기이다. 맘껏 뛰어놀며 세상을 경험했던 아이의 시기에서 벗어나 세상을 알아가고 나를 알아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이런 청소년들에게 꿈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행복한 길인지 알려준다. 『몬테로소의 분홍 벽』(에쿠니 가오리 글 / 아라이 료지 그림 / 예담)에는 꿈에서 본 분홍 벽을 보고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 고양이 하스카프가 등장한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청소년들은 꿈이라는 것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된다.
“쌤, 하스카프가 분홍 벽에 스며든 것처럼 우리도 완벽하게 우리 꿈과 만나는 날이 올까요?”
“음… 사실 쌤은, 몬테로소에 기어이 도착한 하스카프가 멋지기도 하지만 가는 여정을 즐긴 하스카프의 모습이 더 감동적이거든! 사실 쌤의 현재도 분홍 벽인지, 분홍 벽으로 가는 길인지 몰라서 그럴지도… 인생에 완벽이란 건 없지 않을까. 네 인생은 네가 찾고 네 행복도 네가 찾아라. 하스카프처럼.”
어쩌면 청소년 시기는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때인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조건들을 사랑이라는 감정에 덧붙여 무겁게 만들지 않고 그저 사랑 하나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 때이니 말이다. 『새가 되고 싶은 날』(인그리드 샤베르 글 / 라울 니에토 구리디 그림 / 비룡소)에는 새를 사랑하는 칸델라를 사랑한 나머지 새가 되기로 한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커다란 깃털 옷을 입고 학교에 간다. 친구들은 소년을 보고 킥킥대고 웃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소년의 마음엔 온통 칸델라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년이 아닌 새만 바라보던 칸델라는 소년이 깃털 옷을 입고 나타나자 비로소 소년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깃털 옷 안에 숨은 소년의 진짜 모습도 보게 된다.
“에이~ 쌤, 이야기가 좀 현실적이지 않네요. 아무리 짝녀(짝사랑 여자)가 좋아도 깃털 옷을 학교에 어떻게 입고 가요.”
“야! 그만큼 좋아했다는 거잖아! 사실 나도 비슷한 짓 한 적 있어. 깃털 옷은 아니지만 짝녀가 BTS 뷔 좋아한다길래 뷔 헤어스타일로 바꾼 적 있거든.”
칸델라와 칸델라를 사랑하는 소년 덕분에 사랑이라는 감정, 그리고 사랑의 조건, 사랑과 결혼, 스킨십 등 온갖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한 걸까요?” 학교와 집,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말썽꾸러기 취급을 받던 아이가 한 말이다. 그런데 똑같은 말을 아이의 엄마에게서 또 들었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우리 모두 ‘말하기’에 미숙한 탓이라고 했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다 보니 속상한 마음도 버럭, 슬픈 마음도 버럭, 심지어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버럭거림으로 보여준 탓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표현하지 못한 우리 마음들이 그림책에 고스란히 들어있으니 참 다행이지 않냐고 했다.
괜찮다. 다 괜찮다. 조곤조곤 들려주는 그림책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엄마도 아이도 조금씩 서로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울퉁불퉁하고 먼지바람 이는 청소년이라는 시절을 넘고 있는 아이들과 그림책 수다를 마음껏 떨고 싶다.
최혜정_도담도담 그림책 숲 대표, 『그림책, 청소년에게 말을 건네다』 공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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