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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 책의 시선들 9

by 행복한독서

“안녕하세요, 고객님.” 벌써 오늘만도 네 번째다. 나는 상담원의 말을 가만 듣는다. 뭐라고 딱히 대꾸할 수 없으므로 가만히 있다가 “저는 관심없습니다”로 끊는다. 『사람입니다, 고객님』 책을 읽기 전, 나는 전화번호를 보고 스팸 처리를 하거나 받더라도 바로 끊었다. 나는 그들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일하는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입니다, 고객님』(창비)을 읽는 내내 나에게 전화한 이들이 내가 아는 누군가들처럼 보였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어디선가 전화를 하는 그는 이른 아침 집을 나가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나가 종일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거나, 전화를 받다 다시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대부분 일하는 기혼 여성이 그렇듯, 그가 집에 돌아온다고 해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집으로의 퇴근은 두 번째 출근이다.

공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형 공장, 현대화된 건물로 들어간 그들은 화장실에 자주 가지 않도록 물 마시는 것조차 통제받으며 일한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길게 통화를 하는가. 통화 시간은 곧 그들의 실적으로 직결된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의 유일한 해방은 잠깐 동안의 ‘흡연’이다.

이 책을 쓴 김관욱 교수가 처음 콜센터 여성들을 만나러 간 것은 그들의 흡연 때문이었다. 보건소에서 파견한 금연 상담 의사였던 그는 콜센터가 어떻게 여성들의 ‘흡연천국’이라는 별칭을 얻었을까 궁금했다. 여성의 흡연에 대해 관대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당시 콜센터 여성 상담사들의 흡연율은 전체의 37퍼센트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체 여성 흡연율의 다섯 배나 되는 수치였다.

그는 흡연하는 여성 상담사들이 사회의 시선, 아이에 대한 부담 등을 갖고 있으면서도 흡연을 하는 이유를 듣는다. 그리고 흡연이 일종의 ‘노동력 강화제’로 쓰이는 한편, 그 이면에는 흡연을 방조하며 더욱더 실적 달성은 물론 초과를 위해 달려가도록 만드는 힘이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철저한 가부장제에서 살아온 여성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상담사들은 하루에 몇 시간이고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내지만 정작 스스로를 위한 저항의 목소리는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생계(급여)를 볼모로 모욕 앞에 길들여지는 일상은 몸(틀)을 위축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1970, 80년대 여공들처럼 물리적 폭력과 성폭력에 상시 노출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얼마나 진보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의문투성이다.”


우리는 상담사들의 고충을 단순히 감정노동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김관욱 교수는 이들의 노동 형태가 ‘감정노동’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여성 상담사를 ‘콜키퍼’라고 말한다. ‘현대판 디지털 현모양처’로 ‘집을 돌보던’ 하우스 키퍼가 상담 콜을 돌보는 ‘콜’ 키퍼로 잠시 전환된 것뿐이라는 얘기다.

이 책을 읽으면서 50년 전 ‘공순이’로 살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비정규직 상담사들의 삶이 어떤지 비로소 알았다. 50년 전과 지금의 사회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는데, 달라진 것이 없다니. 그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입니다고객님.jpg ⓒ창비(『사람입니다, 고객님』)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의 정의란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오월의봄) 이 책의 부제는 “지방대를 둘러싼 거대한 불공정”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야말로 밤고구마를 물 없이 먹는 듯했고, 추천사를 쓴 강준만 교수처럼 “혈압이 많이 오른 상태”로 책을 읽어야 했다. 아니, 읽는 것조차 힘들었다. 지방대의 편견이 “편견과 차별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교과서적이다. 일찌감치 입시 틀에 아이를 몰아넣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 사회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영화가 나온 것이 벌써 30년도 더 전이다. 그러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적으로 줄 세우기는 여전하거나 더욱 심화됐다.

이 책의 엮은이를 대표하여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은 말한다.


“부모의 경제력·교육열이 뒷받침되는 중산층 이상 자녀들이 명문대에 몰리고, 이들은 비명문대의 몇 배나 돈이 드는 교육을 받아 더 큰 ‘능력’을 키우는 이 구조가 과연 공정한 것인가. 이런 구조를 그대로 두고 ‘입시의 공정성’만 따지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인가. 우리 사회는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답할 것인가.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답답했던 이유다. 이 책을 독서모임에서 읽었을 때 함께 읽은 이들도 똑같이 답답해하고 분노했다. 그런데 30대 후반인 한 친구가 말했다.


“저 때도 그랬고, 당연히 그런 사회라서 답답할 일도, 화날 일도 없어요. 익숙한 걸요.”


그러면서 15년 전, 소위 ‘인서울’ 대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채용박람회에서 상담조차 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마치 지금 갑자기 세상이 바뀐 것처럼 호들갑이냐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그렇다. 바뀐 건 없다. 지방대가 아닌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의 서열도 마찬가지다. 그러게, 뭐가 새삼스럽다고. 우리는 다 같이 절망했다. 나아갈 수 없는 벽 앞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학생을 가르치는 이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 교육제도는 30년 전과 비교해 좋아졌다고, 그러니 희망을 갖자고. 이 책에서 제시한 대학 무상교육 추진, 공영형 사립대 정책, 지역 일자리 늘리기 같은 구체적인 대안들이 희망적이라고. 그러나 나는 솔직히 그의 말에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지방대에 대한 불공정도 문제지만, 편을 가르고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성숙하지 못한 의식이 더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품위조차 지키지 않는 사회.

차별 없는 사회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의 성공이 반드시 나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 사회는 함께 살아가는 곳임을 깨닫는다면 최소한 멸시와 비하의 말들은 못 하지 않을까.


‘휴먼’이 되기 위한 소송과 시위

지난 대선을 앞두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이동권을 요구하며 출근 시간대에 지하철 시위를 할 때 누군가가 말했다. “서울 시민은 장애인의 투쟁 대상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서울 시민은 장애인의 투쟁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지하철을 세울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휴먼』(사계절)의 지은이 주디스 휴먼은 클린턴 행정부의 특수교육 및 재활 서비스국 차관보, 세계은행 최초의 장애와 개발 자문위원, 오바마 행정부의 국제 장애인 인권에 관한 특별보좌관 등등 이력이 화려하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이력은 결국 그의 투쟁사와 맞물린다.

그가 투쟁의 삶을 살 수밖에 없던 것은 차별과 불공정에서 시작됐다. 18개월 때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를 타게 된 어린 주디는 유치원 등록을 거절당한다. 주디가 타고 있는 휠체어가 ‘위험한 장애물’이라는 이유였다. 그의 어머니 일제 휴먼은 딸의 입학을 위해 싸움을 시작했다. 미국 교육 시스템에서 필요 없는, 그래서 “지하실에 숨겨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를 데리고 3년 동안의 투쟁 끝에 공립학교에 비로소 입학시킨다.

나는휴먼.jpg ⓒ사계절(『나는, 휴먼』)

그러나 학교에 들어갔다 해서 끝이 아니었다. “무시당하는 느낌, 우리는 배울 수 없는 존재이자 이 사회와 아무런 관련 없는 존재로 분류당하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디는 “장애는 누군가에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이러한 삶의 진실을 중심으로 인프라와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동료들과 함께 장애인법 제정을 위해 24일간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을 점거하고, “휠체어에서 내려와 버스에 기어”오르고, 의회의사당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주디스 휴먼과 장애인들이 행동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시민권운동과 함께였고, 미국장애인법이 통과된 것은 1990년이었다. 이후에도 지금까지 주디스 휴먼의 투쟁은 진행형이다.


지하철 시위를 하면서 “이동의 자유를 해결해달라”고 말한 박경석 전장연 공동대표는 이 책 뒤에 이렇게 쓰고 있다.

“소송, 점거, 시위, 조직과 연대, 그리고 법률과 제도의 마련까지 주디의 인생을 채운 모든 이야기는 곧 우리 장애 운동가들이 걸어온 길이다.”

‘법률과 제도’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주디스 휴먼이 ‘휴먼’이 되기 위해 ‘소송, 점거, 시위, 조직과 연대’를 한 이유다.


장애인들이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동권 보장’이 안 된 사회에서, 지하철을 타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터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주디스 휴먼이 “미국 교육 시스템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교육에서 배제되어 지하실에 숨겨져 있었다”고 말한 것처럼, 장애를 가진 어린이부터 배제되기 때문이다.


평등과 공정을 말하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세상은 절대 평등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므로 함께 좋은 세상을 향해 한 발씩 내디뎌야 한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거창하게 소리칠 수밖에 없는 이도 있고, 삶의 일상에서 혼자 걷는 이도 있을 것이다. 지하철 시위를 하는 전장연을 격려하며 버스를 타는 것도, ‘지잡대’라는 단어 따위를 쓰지 않는 것도, 콜센터 상담원의 전화를 가만 들어주는 것 같은 아주 작은 일은 혼자 걷는 일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나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다. 인생의 오후에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아침의 눈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임후남_생각을담는집 대표, 『나는 이제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2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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