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의 시선들 8
이어령 교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의 책을 주문하는 독자들이 많이 생겼다. 특히 마지막 인터뷰집이라 할 수 있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주문이 가장 많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식인이 죽음을 앞두고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조차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고 명징하게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문장들을 남겼다. 흔히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면 앞으로 인생을 춤추듯 살아가라고 이야기한다. 마치 니체가 “춤추지 않고 지나간 하루는 그 하루를 제대로 보냈다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요즘처럼 바이러스, 전쟁, 산불, 인플레이션 등 즐거울 일 찾기가 힘든 세상에서.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삶’에 집중할 때 춤을 출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만의 리듬, 자기만의 바이브를 찾아 나답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세상의 난관 앞에서도 솟는 의지로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순 없지만 남은 삶에 대한 태도는 선택할 수 있으니 지금이라도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좀더 깊은 성찰을 하면 내일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어느덧 내 나이도 인생의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한창 때라 할 수 있겠지만 어느덧 청춘은 과거가 된 지 오래된 느낌이다. 가까운 지인들의 죽음도 자주 마주하다 보니 죽음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고, 남은 삶을 살아갈 방법들에 대해 더 자세하게, 자주 생각하곤 한다. 파커 J.파머의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말한 ‘가장자리’로 점점 향해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이유일 것이다. 파머는 인생의 후반전을 맞이했을 때, 중심에서 벗어난 가장자리로 가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속된 말로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들이 뒷방 늙은이 취급한다고도 하는데, 파머는 세상을 다양하고 오래 경험한 나이든 사람들이야말로 삶의 끄트머리에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신선한 논리를 펼친다. 즉 삶의 가장자리에 서야만 세상을 제대로 살펴보는 혜안이 비로소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청년들과 노인들이 상호 연대를 해야만 젊은이들이 일과 삶에서 흔들리는 순간, 더 나은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점도 이야기한다.
현재 우리는 MZ세대와의 마찰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나이든 사람들도 ‘꼰대’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웬만한 잔소리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할 때도 많다. 파머의 책을 읽다 보면 두 세대를 이어줄 연대 의식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나이 듦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고, 적어도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는 말자며 많은 밑줄을 친 책이다. 보다 많은 청년들이 이 책을 꼭 읽어보았으면 한다.
또한 우리에게 롤 모델이 되어주는 잘 익어가는 언니들도 있다. 그중 한 명인 1952년생의 밀라논나를 유튜브로 처음 봤을 때 다른 세상의 할머니 같았다. 새벽에 기상해 기도를 하고 아침 요가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할머니. 꼬불거리는 할머니 파마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안 해봤을 세련된 커트 머리와 무채색의 간소한 인테리어는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정돈된 세련됨을 느끼게 했다. 내 나이에도 따라 하기 힘든, 부러운 삶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쓴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에서도 그녀는 하나뿐인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정돈되고 규칙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녀에 비하면 나는 그동안 너무 막살아왔다. 이것 또한 나의 자유지만, 나이가 들수록 좀더 빛나 보이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 빛남이란 외형이 아니라 이어령, 파커 J. 파머, 밀라논나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하는 ‘어른으로서 행동하는 사회적 책임’이다.
나이가 들어서 좀더 생각도 유연해지면 좋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면서 풀기 힘든 인간관계에 지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들이닥치는 불행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요즘 나는 이 언니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러라 그래』 양희은도 밀라논나와 동갑인 1952년생이다. 데뷔를 1971년에 했으니 노래를 한 지 50년이 넘었다. 목소리는 여전하다. “그러라 그래”는 그녀가 평소 후배들이 이런저런 고민을 이야기해오면 다 듣고선 가장 많이 하는 말이라고 한다. 인생의 많은 파도를 굽이치며 넘어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주변의 힘든 상황에 굴하지 말고 그저 너의 길을 가라는 뜻이 담겨있다. 은근 중독성이 있는 말이라 나 역시도 요즘 꼬인 일이 있으면 그저 “그러라 그래” 이렇게 한마디 뱉곤 한다. 속이 잠시 괜찮아진다.
나이 듦에 관한 책을 살피다 보면, 공통적으로 모두가 ‘나다움’을 찾아 살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절망과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살아온 삶에 대한 고마움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웰다잉을 준비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자본과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과의 사랑, 다정함 같은 것들이기에 소소한 행복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발견한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에서는 ‘포기, 자리, 루틴, 시간, 욕망, 사랑, 기회, 한계, 죽음, 영원’이라는 열 가지 주제로 나이 듦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랑스의 대문호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나이 듦에 대해 파스칼, 몽테뉴, 프로이트, 니체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생각을 첨부해 독자들에게 더 풍성한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그럼에도 메시지는 하나로 관통한다. 비슷하게도 이 책에도 역시 ‘춤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끝까지 ‘사랑하라’는 메시지. 포기를 포기하고 루틴으로 생활의 뼈대를 바로 세우고, 비록 인생의 후반부일지라도 가능성을 놓지 말라며 누구보다 더 찬란하게 살아가라는 작가의 말은 고스란히 『구십도 괜찮아』의 주인공 봉 여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흔임에도 매일 출근하느라 바쁜 봉 여사의 일상은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가와 다이어트에 진심이며, 불금에는 축구 경기를 즐기고 사소한 일로 주변과 다투기도 하지만 “괜찮아!” 한마디를 외치고, 씩씩하게 하루를 보낸다. 비록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고, 검버섯을 가리기 위해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무릎이 내 맘대로 안 될지라도 봉 여사는 경로당 회원들의 간식을 성실히 챙기고 그림책을 만드는 수업에도 열심이다.
하지만 흰머리와 주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듯 어느 날에는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날을 만날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몸에 들어온 병마와 싸우게 될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소중한 사람들과 이별을 준비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눈을 감으며 그럼에도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후회와 아픔과 미련보다는 그저 죽는 날에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삶을 상상해본다. 상상해보니 슬픔보다도 지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이 바뀐다.
이어령 교수는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를 의미하는 라틴어 경구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 말은 삶의 끝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 때 삶에 대한 태도가 더 농밀해진다는 뜻이다.
내 삶을 외면하지 않고 더 깊이 들여다보는 삶. 과거엔 우리 주변에도 무덤이 가까웠다. 유럽엔 도시 안에도 묘지가 있다.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그저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이지선_잘 익은 언어들 대표, 『책방뎐』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2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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