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력
남종영 지음 / 396쪽 / 18,500원 / 북트리거
근래 세계를 달군 하나의 논쟁이 있었다. 시작은 ‘모르는 사람’과 자신의 ‘반려동물’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어느 쪽을 먼저 구하냐는 누군가의 질문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꽤 많은 이들이 반려동물을 택했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개나 고양이보다 못하다는 것이냐’ 내지는 ‘사회가 어떻게 되려고…’ 부류의 분노나 당혹감을 내비쳤다. 그렇다. 오늘날 반려동물은 자타공인 우리네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리고 해당 질문은 반려동물이 인류의 생활양식에 단순히 편입되는 수준을 넘어, 누군가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모양새가 됐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반려동물을 구한 자들의 판단 근거를 추측해보자면, 종 간 비교라든가 인간의 존엄성 따위를 신경 쓰고 내린 결정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개별적 주체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무게 영향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흔하게 표현하는 대로 반려 생활을 하는 많은 이에게 반려동물은 가족이다. 비반려인이 생각하는 정도의 단순한 선언적 의미가 아니라 삶을 공유하며 함께 웃고 또 슬퍼하기도 하는, 상호 정서적 유대감을 지닌 그런 존재일 것이다. 그런 반려인들에게 상기 질문은 '가족’과 ‘모르는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로 들리지 않았을까?
유사한 논의는 앞으로 지속될 것이고 확장될 것이다.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반려동물의 예로 시작했지만, 반려동물 외 다른 동물들도 우리가 몰랐을 뿐 본질적 특성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반려동물과 비반려동물의 대표적 차이는 개별 동물과 개별 사람의 만남이 반려동물 외 동물들은 소거되어있다는 점이다. 돼지를 직접 본 적 있는가? 그리고 어느 특정 돼지 개체를 분별하고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관심 둬본 적 있는가? 산업화, 분업화된 현대사회 속에서는 특히 우리가 이용(먹고, 입고, 실험하는 등)하는 동물들은 철저하게 우리로부터 은폐되어있다. 그래서 작가가 말한 몸과 몸이 만났을 때 나오는 감정의 변화와 마음의 움직임인 ‘정동의 힘’이 반려동물 외 다른 많은 동물에게는 발현되지 않는다.
나는 시골 출신으로 어릴 적 마을 잔치를 위해 어르신들이 돼지 한 마리를 잡는 걸 보았다. 당시 마을 어르신들은 직접 키운 돼지를 도축했다. 태어날 때부터 성장을 거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돼지의 일생을 바라본 농장주의 심정은 어땠을까? 해당 과정에서 돼지에 대한 연민, 일정 부분의 죄의식 그리고 정당화 과정 등 복잡미묘한 감정이 일었을 터인데 이런 감정을 지금의 마트 정육 코너 소비자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 상상하건대 과거 백정이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동물과의 만남을 통해 마음이 동했으리라.
동물을 만나고 알게 되면 그들이 느끼고 또 스스로를 표현할 줄 아는 능동적이고 복잡한 주체라는 점에 놀라게 된다. 작가가 소개하는 몇몇 사례는 특히 동물에 무지한 이들에게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돌고래쇼에 이용되는 범고래가 불만이 생기자 쇼를 제대로 하지 않는 태업을 통해 사육사와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이 과정을 통해 본인의 의지를 사육사에게 관철시킨다는 이야기는 인간 세상 속 노사 대립과 유사하다. 또한 인간 가정에서 양육되며 수화를 배운 오랑우탄 ‘찬텍’이 안전상의 문제 등으로 다시 케이지로 돌아갔을 때 수화로 보호자에게 “엄마, 차에 가자. 집에 가자”라고 말한 대목은 뭉클함을 넘어 동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건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이쯤되면 누구라도 인간(종)은 아니지만 인격이 있는 동물들을 분류하여 ‘비인간 인격체’로 명명하는 학자들과 동물운동가들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다.
작가는 『동물권력』이란 다소 강성의 단어로 먼저 독자들과 만난다. 하지만 거친 단어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는 대립이 아닌 동물이 우리를 변화시킬 본성과 영향력에 대한 것이다. 인간만이 동물을 통제하고 동물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동물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들도 느끼고 표현하는 능동적 존재임을 행동으로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종 담론을 넘어 개별적 주체에 집중할 때 더욱 폭발적으로 드러난다.
관계의 재설정이 필요한 때다. 혁신적이면 가장 좋겠지만 점진적이어도 괜찮다. 근래 많은 철학자가 인간종과 다른 동물들이 차이가 없음을 증명하느라 애쓰는 사이, 작가는 개별적 주체 간의 만남과 관계 그리고 상호 영향력을 중심으로 인간과 동물 관계의 나아갈 방향과 미래상을 찾아본다. 이때 필요한 건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의 주장처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친절’일 수 있다. 친절은 당장 베풀 수 있고 또 정의(justice)를 정의(define)하는 것보다 더 개별자들에게 와닿게 적용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해 이야기했지만, 인간도 사실 동물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인간종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 우리를 충분히 설명하거나 증명해주진 못한다. 이를테면 결혼은 배우자를 사랑하기에 하는 게 아니라 ‘인간들의 종 번식을 위한 효율적인 짝짓기 제도’라는 식의 설명이 온전히 내 감정과 내재 가치를 설명하고 증명할 수 없다. 종 번식으로 단순화된 당신의 사랑이라니, 꽤 모독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인간 외 동물을 그렇게만 설명하고 인식한다면 우리라고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
그러니 인간들이여! 단결하여 몰랐던 동물을 발견하고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리하여 자칫 부정당할지도 모르는 주체적이고 개별적 존재인 나나 당신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회복하자.
장병진_동물자유연대 활동가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3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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