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그림자
김규정 글·그림 / 48쪽 / 15,000원 / 보리
“넌 꿈이 뭐야?”
그 시절 어른들에게 듣던 단골 질문 중 하나였죠. 아마 아이의 꿈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아이와의 어색한 상황을 넘기기에 이보다 좋은 공식 질문은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였는지 그 시절의 나도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어른이 불쑥 내 꿈에 대해 물어오는 게 무언가 순서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는 느낌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어른들이 물었던 “꿈이 뭐야”라는 질문이 “너 커서 무슨 직업 갖고 싶어?”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더라고요. ‘꿈 = 직업’이라는 공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라온 환경 때문이었겠죠. 그러니 그 시절 아이들도 꿈을 직업으로 대답했어요. 제가 어릴 땐 과학자, 선생님, 소방관, 의사, 경찰, 군인, 판사 같은 직업을 많이 얘기했어요. 가끔 포부가 큰 친구들은 당당하게 대통령이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요즘 아이들은 유튜버나 아이돌 가수가 꿈이라고 해요. 그러고 보면 여전히 우리는 아이들에게 꿈은 직업이어야 하는 질문임을 묻고 있네요.
어린 시절, 같은 질문에 “하늘을 나는 거요”라고 대답한 친구가 있었어요. 친구들은 직업이 아닌 엉뚱한 대답을 한 그 애를 비웃었고 질문을 한 어른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거구나”라며 그 애의 대답을 직업으로 연결시켰죠. 하지만 그 친구는 “그냥 하늘을 나는 거”라고 다시 대답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자꾸만 허무맹랑한 대답을 하던 그 애를 비웃었고 그 어른도 멋쩍은 웃음을 짓고 더는 묻지 않았어요.
지지난 방학 때였어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때라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죠. 늘 비슷한 것들을 하니 제 딸 솔이도 지겨워해서 무얼 할까 하다가, 오랜만에 먹을 갈고 한지를 펼쳐 그림을 그려보자고 했어요. 오랜만에 한지와 먹 냄새를 맡으니 새롭더라고요. 그런 새로움을 느낀 것과는 달리 내 오른손은 역시 비슷한 그림을 그려냈어요. 마치 직업적 그림을 그려내는 손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솔이 그림은 거침없었어요. 선은 단순하고 표현은 통통 튀었어요. 내 그림 속 인물들이 당장이라도 일을 하러 가야 할 것 같다면 솔이 그림 속 인물들은 당장이라도 숲으로, 바다로, 우주로 튀어 나갈 것만 같았죠. 그중에 시커멓게 칠해진 새 그림이 하나 있었어요.
꿈꿔본 적 없는 어른들의 질문이 쌓여 우리 사회가 만들어졌어요. 꿈은 직업이 되고 직업은 곧 내가 돼버렸죠. 그러니 다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들어가 그들만의 리그 속으로 들어가려 해요.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새 그림자』는 스스로를 삶의 주인공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거대한 사회 속에서 그림자로 살아가는 ‘우리’ 이야기예요. 우리가 이룬 것들이 곧 우리 자신인 듯하지만 사실 그 자리는 언제든 다른 것들로 메워질 수 있어요. 그런 가운데서 실재하는 ‘나’를 찾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솔이가 ‘그림자 새’라는 말을 하자 혼돈의 우주 속에서 무언가가 쑥 하고 내 앞으로 나온 것 같았죠.
자신이 이룬 성취가 곧 자신이라 믿는 이들은 그것이 실은 그림자처럼 언제든 타자로 대체될 수 있는 것임을 어떤 순간이 오기 전까지 알지 못해요. 아마 진작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어 눈감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렇기에 그 어느 순간에서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은 아마도 스스로를 향한 여행을 평생 멈추지 않는 게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요? 사회적 혹은 직업적 내가 아닌 진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탐험을 멈추지 않는 것 말이에요. 그래서 어느 순간, 이 거대한 사회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게 숙명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탐험을 통해 스스로를 비춘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닌 그림자를 가진 진짜 내가 돼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신처럼 그림자로 살라고 강요하지 않을 테고요.
꿈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던 그 친구는 하늘을 나는 꿈을 이뤘으면 좋겠네요. 이번 작업을 하는 동안 직업적 손에서 잠시나마 꿈을 이야기하는 손이 되게끔 도와준 솔이도 자신의 다양한 꿈을 향해 지금처럼 거침없이 나아갔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이 책을 접하게 될 모든 분도 그러하길 작은 마음을 담아 전합니다.
김규정 작가는 바다 곁에서 살다 지금은 산 아래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봄에는 제비와 소쩍새를, 여름엔 파랑새와 휘파람새를, 가을엔 고니와 기러기를, 겨울엔 큰말똥가리를 기다리며 지냅니다. 쓰고 그린 책으로 『밀양 큰할매』 『계란말이 버스』 『난 그냥 나야』 『권리랑 포옹해』 등이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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