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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만들며 자라나는 나

그림책과 나 - 배유정

by 행복한독서

사실 저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어요. 미대를 졸업한 이후에야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를 고민했었으니까요. 대학 졸업은 말하자면 완전한 자유의 순간이었지만 방황의 시작이기도 했어요.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취업이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또 다른 ‘안정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고민도 많이 하고 수없이 방황했지만 결국 그 과정들은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어떤 분야’의 작가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 또 남아있었지만 말이에요.

그림3-김경휴 작가와 ⓒ배유정.png 김경휴 작가와 ⓒ배유정

졸업 이후 아주 잠깐 무대미술을 했어요. 그중에는 ‘아름다운 가게’ 5주년 기념행사에서 무대를 연출한 일도 있었어요. 당시 어린이 미술학원에서 강사도 하고 있었는데, 골판지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오려서 건물을 만드는 활동 수업이 있었어요. 그 수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저는 골판지를 주재료로 삼아 건물 여러 채와 일명 ‘아름다운 가게 트럭’을 만들어 세워놓고 그 뒤로는 커다란 배경 그림을 그려 넣어 무대를 꾸몄어요. ‘리사이클’이라는 회사 모토와 ‘골판지’라는 소재가 딱 들어맞아서 무대는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무대미술 일은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하지만 그 일을 계속 하기에는 전문적인 공부가 필요해 보였어요. 마땅한 작업장도 없었고 재료 확보나 기술의 숙련도 저에겐 막막한 일처럼 느껴졌어요.


그다음으로 제가 한 일은 일러스트 일이었어요. 책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는 일러스트는 무대미술과는 규모나 성격 면에서 매우 달랐어요. 처음 작업한 책은 시집이었고 크기도 매우 작았어요. 삽화는 한 80컷 정도를 그렸는데 선금으로 50만원을 받았어요. 인세 계약이었는데 그 뒤로 인세 보고를 받는 건 둘째 치고 인세를 받아본 적도 없었어요. 제가 그린 삽화 중 하나를 표지로 삼아 개정판을 내었는데도 저는 그 사실조차 몰랐으니까요. 한참 후에 서점에서 우연하게 보게 되었고 그제야 개정판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 뒤로 몇 번 더 일러스트 일을 했었는데 그때마다 저는 제 자신이 소진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삽화로 쓰이기에는 제 그림의 개성이 너무 강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나 자신을 관찰하며 만든 책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했었는데 결국 그림책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어요. 그림책이라는 장르를 알게 된 시기이기도 했고 그림이 끌고 가는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사실 그때가 제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였어요. 절실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재미도 있었거든요. 그때 보냈던 시간은 꿀처럼 달았어요. 그 일 년 동안 저의 이야기와 그림 스타일을 찾기 위해 습작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림책학교를 졸업하고 6년이 지난 뒤에 첫 책이 나왔어요. 길게 늘이면 15미터 정도 되는 아코디언북 형식의 그림책 『나무, 춤춘다』 예요. 한 장 한 장 손으로 이어 붙여야 하는 까다로운 제작 방식을 가진 그 책을 출판사는 열심히 고민하며 만들어주었어요. 비용도 많이 들고 제작하기도 어려운 책이었는데 그 당시 편집자님이 이렇게 말씀을 해주어서 힘이 났어요.

“이 책은 팔려고 낸다기보다는 내야만 하니까 내는 거예요.”

사실 그 책은 그 당시 불안하고 미약했던 저 자신을 들여다보며 한편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책이었어요. 나무 밑동 아래 거대한 세상이 제 내면에서도 발견되기를 바라면서 말이에요.


두 번째 책은 남미 여행 중에 기획을 했어요. 여행하면서 드로잉을 많이 했었는데 여행을 마치고 그림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어둡고 그로테스크하게 보였어요. 그래서 제가 여행 중에 느낀 지배적인 감정이 ‘불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두 번째 그림책 『밤버스』를 출간하게 되었어요. 장거리 이동 때마다 탔던 ‘밤버스’를 소재로 여행 당시 느꼈던 ‘불안’을 추적하고 확장시켜서 이야기를 가다듬었죠.

그림3-ⓒ길벗어린이(『안녕! 파라다이스』).png ⓒ길벗어린이(『안녕! 파라다이스』)

이 두 권의 책은 저 자신을 관찰하며 만들어낸 책이에요. 그래서 저를 쏙 빼닮은 책이기도 해요. 두 권이 그랬다면 다음 작품은 조금 다른 내용이었으면 했어요. 그래서 남편이 글을 쓰고 제가 그림을 그리는 공동작품을 만들었어요. 그건 좀더 ‘우리’에 관한 이야기, 『안녕! 파라다이스』라는 그림책이에요. 오리너구리와 고래상어가 파라다이스를 찾아가는 내용이에요.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리에 그림이 떠올랐어요. 이 책은 기존의 제 그림책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를 거예요. 좀더 이야기도 아기자기하고 이미지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했거든요.


우유부단하고 방황하던 저는 그림책을 통해 불안을 걷어낼 수 있었고 내면의 세계를 믿을 수 있게 되었어요.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던 탓에 남들과 소통하기도 힘들어했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다음 작품이 만들어질 때면 저는 조금 더 자라나 있겠죠.


배유정_그림책작가, 『밤버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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