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는 그림책작가의 세계
자연계에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실제든 상징적이든 애벌레 시절을 겪고 나비가 돼요. 타고난 재능과 노력, 환경에 따라 흰나비든, 노랑나비든, 호랑나비든, 색만 다를 뿐이지요.
에릭 칼이 처음 알에서 깨어난 곳은 미국 시러큐스였어요. 독일계 이민자인 부모와 숲속 탐험을 즐기고 햇살 환한 교실에서 색색의 물감을 가지고 놀며, 다섯 살 때까지 즐겁게 살았지요. 그러다 부모가 역이민을 결정하는 바람에 작은 애벌레는 독일 슈투트가르트로 터를 옮겨 경직된 학교와 사회 분위기에서 힘겹게 꿈틀거렸어요. 청소년기에는 나치의 광기에 사로잡혀 “하일 히틀러!”를 외치기도 했지만, 천성은 드로잉에 그대로 나타나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다가 슈투트가르트의 예술 디자인 학교에 진학했어요. 이때 종이에 손도장도 찍고 솔과 붓으로도 그리고 점점이 뿌리기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여러 가지 색깔을 입힌 색지들을 만들어 조각조각 자르거나 찢어서 추상적인 패턴과 디자인으로 배열하는 것을 연습했어요. 이것이 나중에 그의 그림책 스타일로 정착되었답니다.
에릭 칼은 졸업한 뒤 한동안 광고계라는 고치에 들어가 있었어요. 매우 성공적인 경력을 쌓으면서도 고객 관리, 배신과 음모에 지칠 무렵에 의학 잡지에 실린 그의 빨간 가재 그림 광고가 작가 빌 마틴 주니어의 눈에 띄었어요. 에릭 칼은 빌 마틴과 함께 『갈색 곰아, 갈색 곰아, 무엇을 보고 있니?』를 만들었어요. 그가 자기 안에 숨어있던 어린이를 그림을 통해 유쾌하게 드러낸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에릭 칼은 그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반복과 리듬의 중요성을 배웠고, 이후 다른 그림책들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어요.
『배고픈 애벌레』(The Very Hungry Caterpillar)는 에릭 칼이 화려한 날개를 펼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수 있게 해준 책이에요. 처음에는 책벌레를 주인공으로 하려 했어요. 그러다가 사과, 배, 초콜릿 케이크를 먹어 구멍을 내며 들어가는 녹색 벌레 이야기로 바뀌었고, 마지막에 애벌레로 결정되었답니다. 편집자가 녹색 벌레 대신 애벌레는 어떠냐고 묻자마자 에릭 칼이 “나비!”라고 외쳤대요. 이 책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소들로 가득해요. 우선 아이들은 구멍에 손을 넣어볼 수 있어요. 그리고 “one, two, three….” 이렇게 세어볼 수도 있고, 요일과 음식 이름을 익힐 수도 있어요. 게다가 ‘알 → 애벌레 → 고치 → 나비’로 바뀌는 신비로운 과정을 함께할 수 있어요. 이후 에릭 칼은 똑같이 ‘The Very’로 시작하는 책들을 더 만들어요. 이 책들은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책에 속해요. 반딧불이 반짝거리고,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나고, 거미줄이 도드라져 있어 손으로 만져보면 촉감도 느낄 수 있지요. 그는 청각, 시각 장애아들도 좋아하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고 해요.
글자 없는 그림책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인 『I See a Song』은 흑백으로 처리된 바이올리니스트에게서 다양한 색채의 선율이 공기 방울처럼 흘러나와 야자수잎 같기도 하고 눈썹 같은 모양으로 되었다가 배가 되고, 초록색 줄은 파도가 되고 아이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되었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져 뿌리로 변하고, 꽃이 피어나고 민들레 홀씨로 변해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이올리니스트를 색색으로 물들이는 환상적인 그림이 가득 펼쳐지는 책이지요. 이 밖에도 몸의 이름과 동작, 동물들의 특성을 연결한 『From Head to Toe』, 고양잇과에 속하는 동물들과 세계의 가족 풍경을 보여주는 『Have You Seen My Cat?』 등 에릭 칼의 그림책들은 끝이 없어요.
그는 일본 여행에서 이와사키 치히로의 작품 전시관인 치히로미술관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미국에도 그림책 미술만을 전문으로 하는 미술관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서 오랜 준비 끝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애머스트에 에릭 칼 그림책 미술관을 세웠지요. 그곳의 로비는 에릭 칼이 직접 붓 대신 청소용 빗자루로 네 가지 색을 칠해서 완성했답니다.
그는 대학 시절에 작업한 그대로, 지금도 자신의 색지를 만들어요. 그 작업을 할 때는 거의 무아지경에 이를 정도로 푹 빠지지요. 틈틈이 전시회들을 보며 아이디어를 얻는데, 특히 미술관에 가서 회화를 보면 전체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붓질을 해서 만들어낸 질감, 풀이나 나뭇잎의 패턴 등에 매혹된다고 말해요. 특히 르누아르, 쇠라, 모네, 드가, 반 고흐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붓놀림, 점, 패턴에 황홀해져서 영감을 받고 작업실로 돌아와 종이에 색을 더욱 많이 칠한답니다. 그리고 그 종이들을 푸른색 계열은 푸른색 칸에, 빨간색 계열은 빨간색 칸에 넣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지요. 그리고 우리는 반복과 리듬감 있는 문장, 다양한 색채가 어우러진 그의 콜라주 그림책들을 펼치고 즐거워하고요.
서남희_번역가,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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