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화의 영국 책방 이야기 2 - 토핑앤컴퍼니, 몰라서점
영국에 다녀온 후 “어느 도시가 가장 좋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에든버러와 케임브리지 그리고 옥스퍼드처럼 역사가 오래된 도시가 매력적이었지만 덜 알려진 작은 도시의 아름다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가보고 싶은 아름다운 도시를 찾는 간단한 방법을 깨달았다. 그 도시에 매력적인 서점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살피면 된다. 영국에는 대형서점 체인 워터스톤즈가 없는 도시가 없다 해도 빈말이 아닐 정도다. 어떤 도시에 워터스톤즈가 있는데도 매혹적인 독립서점이 존재한다면 그 도시에는 분명히 무언가 있다.
영국에서 만난 서점 중 토핑앤컴퍼니Topping&company(이하 토핑)를 빼놓을 수 없다. 2002년 워터스톤즈에 근무했던 로버트 토핑이 케임브리지에서 가까운 일리에서 처음 서점을 시작한 이래 2023년 현재 바스, 에든버러, 세인트앤드루스에 지점을 열 만큼 성장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일리, 에든버러, 바스 지점을 방문하는 행운을 누렸다. 특히 바스와 에든버러에 있는 토핑은 시간을 내어서라도 꼭 가볼 만한 곳이었다. 규모도 크고 오래된 건축물을 서점으로 사용해 운치가 남달랐다. 알고 보니 토핑이 처음부터 이런 근사한 건물에서 서점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시간을 두고 서점하기 적합한 건축물을 찾고 이전한 결과였다. 세 곳의 토핑을 만난 후 너무 멀어 갈 엄두가 나지 않던 세인트앤드루스에 가보고 싶었다. 토핑이 있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위치 선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토핑을 보면 서점의 입지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토핑이 있는 곳의 공통점은 우선 명망 높은 대학 도시라는 점이다.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 혹은 에든버러에 비해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골프의 발상지로 더 유명하다. 하지만 1413년 설립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영국 최상위 대학 중 하나다.
“태양아래 세인트앤드루스 만한 곳이 없다”는 말이 있다. 스코틀랜드가 추운 건 잘 알려져 있고 세인트앤드루스는 모스크바와 같은 위도에 있는데 뭔 말인가 싶었다. 알고 보니 세인트앤드루스는 “바다에 인접한 온화한 해양성 기후 덕에 겨울 평균기온이 4도” 정도다.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춥지 않다는 뜻이다. 또 잉글랜드 남부와 맞먹는 일조량을 자랑한다. 은퇴한 지식인이 살고 싶은 곳인 데다 젊은 지성인까지 더해져 문화적 기반이 탄탄한 도시였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나 북쪽의 에든버러와 남쪽의 바스도 입지 조건이 세인트앤드루스와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로버트 토핑은 자신이 근무했던 상업적인 워터스톤즈와 전혀 다른 서점을 창조했다. 토핑은 한마디로 비상업적인 책을 다양하게 갖춘 서점이다. 이런 책이 팔리겠나 싶은 고가의 스페셜 에디션이 많다. 토핑을 방문하면 누구나 지식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천장까지 들어찬 높은 서가와 책 사다리는 토핑의 심벌이다. 직원들은 책에 밝은 전문가이며, 단골들의 이름은 물론 취향까지 안다. 저자 행사를 정기적으로 진행하며 저자 사인 초판본이 준비되어 있다. 서점을 이루는 이 모든 세심함이 값진 고객 경험을 만든다.
서점이 많기로는 프랑스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 파리가 아닌 보르도에 있는 몰라Mollat서점은 영국의 토핑과 비견할 만한 곳이다. 몰라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서점으로 보르도 시청 근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다. 1896년 창업자인 알베르 몰라가 서점을 시작하며 주변 상가를 사들여 확장한 결과다. 지금은 아들인 데니스 몰라가 대표를 맡고 있다.
보르도는 가론강을 끼고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데다 대서양과 인접한 무역항이다. 로마시대부터 시작된 도시의 역사를 보여주듯 보르도에만 347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작은 파리’라고 불릴 만큼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에 빠질 수 없는 게 서점이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쓴 최혜진은 보르도에서 유학할 때 몰라서점의 윈도우를 보다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고 한다. 너무 아름다워서다. 푸른색이 선명한 윈도우마다 문이 여럿 있다. 특이하게도 철학, 음악, 문학, 예술, 과학 등 분야마다 문이 따로 있다. 대신 안으로 들어가면 넓디넓은 서점이 펼쳐진다.
전통을 자랑하는 서점은 온라인 마케팅에 취약한데 몰라는 예외다. 2001년부터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마다 차별화된 콘텐츠를 서비스한다. 2005년부터 작가 인터뷰 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린 것만 약 1,300여 개다. 인스타그램에는 서점인이 연출한 유쾌한 북스타그램이 올라온다. 인물이 실린 책 표지와 실제 사람을 이어 붙인 포스팅은 몰라가 원조다. 덕분에 2023년 현재 몰라의 팔로우는 10만을 상회한다. 이런 온라인 마케팅은 팬데믹 와중에 진가를 발휘했고 “광고에 돈을 쓰는 대신 자체 미디어를 디자인하여 고객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보기 드문 서점이 되었다.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모종린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각자 로컬을 어떻게 도울까 고민해야 한다면 독립서점을 추천합니다. 평소 독립서점을 이용하고 여유 있으면 은퇴 후 서점을 창업하세요. 저도 지역 소도시에서 1인 연구소 겸 독립서점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독립서점이 있다는 것 자체가 동네의 품격을 높이고 그 동네를 로컬 지도에 올리는 일”입니다.
한미화_출판 칼럼니스트, 『동네책방 생존 탐구』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3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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