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28 - 이수연
맨 처음 그림책으로 나왔던 『이사 가는 날』은 작가가 영국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작가 스스로 제대로 된 완성작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이 작품은 출판사의 간절한 요청으로 나오게 되었다. 공부하러 가기 전에 만들어 놓았던 것을 멀리서 서로 연락하면서 데이터를 넘겨준 것이다.
이 그림책의 첫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두운 갈색 톤의 수채 물감에 펜으로 그려진 듯한 몽환적인 풍경, 머지않아 재개발로 곧 없어질 도시의 밤을 함께 살았던 강아지 랑이와 공중에서 날아다니며 살피고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작별을 고한다. 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어 그곳을 떠날 때까지 수없이 지켜보았을 땅과 집과 흔적에 안녕을 한다.
『내 어깨 위 두 친구』의 어느 부분에서도 사라져버린 그곳을 그려냈다. 어릴 적 그때와 다른 점은 이제는 그림책작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 그가 그려내는 대부분의 기억과 손으로 그리는 재능은 모두 그곳에서 함께 자랐고 당분간은 그럴지 모른다. 부모님은 어린 시절부터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림으로는 절대 여유 있게 살지 못한다는 완고한 어른들의 사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학 진학을 위해 잠시라도 거쳐야 했던 미술학원 등록 때도 의견이 달랐다. 화실 선생님은 어머니와 면담 때 작가에게 숨은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사실대로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얘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던 것 같았다. 그냥 의례적인 칭찬 정도로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에 아이들을 키운 대부분의 어른들은 더욱 예체능 분야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 있었을지 모른다. 학교 공부에 앞서 만화와 음악, 영화 등에 빠져있는 자식에 대한 염려가 컸기 때문이다. 때때로 생활에 바쁜 부모들은 그런 관심조차 벅찰 때가 많았다. 그에게는 오히려 그런 적당한 방임이 더 나았다. 그 덕에 입시를 며칠 앞둔 날까지 만화를 보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만약 학창 시절 내내 입시 공부만 했었다면 오히려 지금의 작품들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0대 청소년기의 감성과 20대에 정말 필요해서 공부한 지식의 바탕이 지금 한 편 한 편 나오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대학 수업에서 등장하는 안도 다다오 등의 모던 스타일 건축에 대한 내용은 그가 생활해 왔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이질감이 있었다. 그래도 모두 만족할 수 없는 것이 학교이기도 했다. 졸업 후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고 싶은 생각에 출퇴근 정확하고 월급이 제때 나오는 직장 생활을 했다. 전공했던 분야와 아주 동떨어진 상품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의 3년은 맞지 않았다. 잠시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다녔지만 그가 하고 싶은 일은 다른 데 있었다. 그러나 가구 세일즈 일도 지나고 보면 결코 헛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이때의 경험은 『어떤 가구가 필요하세요?』에서 그의 독특한 표현 기법인 동물 캐릭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쓸데없는 시간, 경험, 몽상마저도 쓸데없는 게 아님을 이때부터 작품으로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 무렵부터 궁금한 것을 풀기 위해 스스로 공부한 시간은 지금까지 학교에서 했던 어떤 공부보다도 유익했고 가장 왕성하게 집중하며 몰입한 기간이었다.
직장에서의 시간이 오히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그림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 것처럼 그는 그림 공부를 위해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다른 방법으로 동의를 얻어냈다. 언어에 대한 기본도 없이 떠났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온라인에서 영어를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았는데. 마침 합격한 학교에서 같은 전공을 하고 있는 영국인 친구를 만났다. 『나를 감싸는 향기』에서 홍당무 캐릭터로 나오는 모델이기도 했고 함께 지내는 내내 창작의 영감을 받은 친구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 역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 학생이었다. 놀랍게도 이 친구는 자신의 개인 성장담을 작가의 그래픽노블 작업에 등장시키는 데 동의를 해주었다. 『나를 감싸는 향기』는 216쪽의 두툼한 분량의 작품으로 이렇게 탄생했다. 작업에 앞서 그를 크게 깨우치게 한 것은 학교의 수업 방식이었다.
모두 철저하게 개인의 자율성에 맞추어 진행하다 보니 그동안 경험했던 익숙한 방식으로는 적응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것도 가르쳐주는 것이 없었다. 그저 스스로 알아서 재료를 찾고 그린 다음 피드백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에 수성 재료가 적당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학교 분위기 덕분이었고 무척 큰 발견이었다. 이렇게 큰 소득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그가 마주한 일들은 그림책 작업뿐만 아니라 결혼 후 이어진 육아였다. 이란성 쌍둥이를 키우며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일상으로 해야 하는 시간들은 날마다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아이들과 병원을 다니며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달에서 아침을』 계약 후 2년여,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이 작품은 기적처럼 2020년에 나오게 되었다. 이 책 마지막에 흐르는 줄리 런던의 「Fly me to the moon」을 듣고 있으면 작가가 10대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어렴풋이 음악으로 짐작하게 한다.
언어가 조금 느린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보고 읽어주면서 그는 그림책에 대한 눈이 이전과 달라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너는 나의 모든 계절이야』를 그리면서 특히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 몇몇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위로받으며 회자되고 있다. 대부분 그의 삶 모두에서 녹여낸 이야기는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 기법, 묘사력으로 큰 울림을 전한다. 작가에게서 다시 한번 실감한다. 그림책은 머리와 손에서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님을.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이야기』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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