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안부, 시니어 그림책 5
할머니의 뜰에서
조던 스콧 글 / 시드니 스미스 그림 / 김지은 옮김 / 48쪽 / 15,000원 / 책읽는곰
『할머니의 뜰에서』는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로 평단의 주목과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은 조던 스콧과 시드니 스미스가 다시 함께 작업한 그림책입니다. 앞선 책이 조던 스콧 본인의 이야기였다면 이번 책은 조던 스콧이(외)할머니와의 추억을 그려냈다는 점이 다르지요. 그러나 어눌하면서도 웅숭깊게 전개되는 시적인 언어들과 말없이 손길과 눈길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할머니와 손주의 사랑은 인간 내면의 깊숙한 감정을 빛과 어둠, 크고 작은 사각의 틀과 줌인-줌아웃의 표정 묘사를 통해 절절히 표현해 내는 시드니 스미스의 몽환적인 그림에 힘입어 또다시 독자의 온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초록 정원 속 할머니와 손주의 파랑, 노랑 옷이 붉은 꽃과 어우러져 화사한 빛으로 아롱거립니다. 소년의 기억은 꿈같은 색을 입고 독자의 시선을 이끌어갑니다.
주인공 바바는 폴란드 태생으로 2차 세계대전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은 후 캐나다로 이민을 옵니다. 그녀와 가족은 고속도로 옆 유황 광산 뒤편 양계장용 오두막을 고쳐서 살았는데, 이젠 그녀의 곁을 모두 떠나 혼자 지냅니다. 아빠는 아침마다 어둑한 바닷가를 지나서 할머니의 오두막에 아이를 데려다줍니다.
책장을 넘기면 빨강·파랑·노랑 삼원색으로 그려진 할머니 집 주변과 아이, 굴뚝의 연기와 빨간 문이 있는 작은 오두막이 무척이나 정겹습니다. 바바의 손으로 수확한 과일이며 채소가 놓여있는 거실에는 따사로운 햇볕이 내비칩니다. 할머니는 춤추듯이 부엌을 오가며 흥얼흥얼 손주의 아침밥을 준비하고 서로 눈빛과 손짓으로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시처럼 전개되는 문장들과 오랜 꿈속 장면 같은 풍경들이 굳어있던 독자의 마음을 말랑이게 하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바바는 더욱 천천히 걸으며 아이와 지렁이를 찾습니다. 진흙을 채운 유리병 속에 지렁이를 주워 담고서 오두막 텃밭으로 간 뒤에 토마토, 오이, 당근, 사과나무 앞에 앉아서 지렁이들을 땅에 내려놓고 흙으로 잘 덮어줍니다. 할머니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작은 생명체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어서겠지요?
세월이 지나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빌딩이 들어서고, 텃밭은 정글이 되어버립니다. 바바는 아이의 집 복도 끝, 방에 누워있고요. 이젠 아이가 아침마다 할머니께 오트밀과 사과로 식사를 챙겨주고 그녀가 사과 한 조각을 흘리면, 떨어진 음식에 입을 맞춘 후 다시 그릇으로 옮겨줍니다. 작가는 특히 이 부분에선 글 없이 그림만으로 4쪽을 전개하며 독자를 몰입시킵니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에서 강물 안에 들어선 아이와 반짝이는 물살의 만남을 4폭의 펼친 그림으로 묘사하여 독자를 전율케 할 때처럼 말입니다.
아이는 난생처음 바바가 간직하던 방울토마토 씨앗을 심습니다. 화분을 할머니의 침대 머리맡 창가에 놓고, 잘 자라기를 바라며 두 사람은 손 간지럼을 태우면서 비 오는 풍경을 바라봅니다. 그러다 아이는 불현듯 빗속으로 뛰어 내려가더니 할머니가 내려다보는 창 쪽으로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주울 수 있는 모든 지렁이를 주워 모으기 시작합니다. 손주의 뒷모습에서 그녀 자신을 보는 순간입니다. 바바의 따뜻해진 눈시울과 미소가 그려집니다.
펼쳐지는 모든 장면과 언어들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조용히 눈빛과 손짓으로 마음을 전하기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더욱 몰입할 수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가만가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우리 자녀와 손주들에게 어떤 엄마와 할머니로 기억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라고요.
서울 한복판에 있는 어느 맛집은 바닷가 할머니가 오직 손녀만을 위해서 만들어준 음식을 손녀가 그 손맛을 계승하여 지금도 그 사랑의 맛을 전합니다. 『콩 심기』의 저자 신보름은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많았기에 그 속에서 지혜를 얻고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책 작업 및 다양한 활동을 펼쳐가고 있습니다. 또, 북촌에 살면서 1인 출판과 글, 그림 작업을 하는 하정 작가는 독일 여행길에서 덴마크 여인 줄리를 만납니다. 그녀의 어머니 아네뜨 집에 한 달간 머물며 디자이너 할머니의 일상을 담은 책을 펴내고, 나이 들어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사랑과 유산이 이처럼 남들에게까지 드러나는 것이 아니어도 되겠지요. 조던 스콧과 바바처럼 둘만의 비밀이어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나온 세월을 조심스레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고, 무엇을 마음의 유산으로 남겨야 하나, 생각이 깊어집니다. 살아온 발자취와 남은 세월을 숙고하게 만드는 『할머니의 뜰에서』를 나이 들어가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읽을수록 울림이 깊습니다.
김정해_어른그림책연구모임 활동가, 『어른 그림책 여행』 공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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