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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Oct 17. 2023

생명의 존엄을 묻는 고라니의 얼굴

이름보다 오래된

문선희 지음 / 196쪽 / 29,000원 / 가망서사



내가 고라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느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였다. 영화에서 고라니는 실수로 농수로에 빠져 그곳에서 나오지 못해 죽어있었다. 야생동물 구조센터 직원들은 이미 뻣뻣하게 굳은 사체를 비닐봉지에 담았다. 몇몇 고라니는 다행히도 죽기 전에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그렇게 구조된 고라니는 야생동물 구조센터에서 치료하고 돌봄을 받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순치되거나 장애가 생겨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개체는 보호센터에 머물게 된다. 그마저도 머무를 공간이 없어지면 그때는 안락사하게 된다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내용이었다. 그러한 실상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라니라는 동물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그 현실의 비참함에 더욱 놀랐다.


『이름보다 오래된』의 표지를 가득 채운 고라니 사진을 보고 다큐멘터리에서 받았던 충격만큼이나 놀랐다. 물론 이번에는 조금은 긍정적인 놀라움이었다. 그것은 수컷 고라니의 눈에 확 띄는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 때문이었다. 수컷 고라니가 송곳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영화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문선희 작가의 사진을 보면서 훨씬 더 존재감 있게 수컷 고라니가 다가왔던 것 같다. 고라니라는 동물을 일반화하여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에서 보지 못하고 놓쳤던 것을 문선희 작가가 보여주는 초상 사진이라는 형식을 통해 고라니의 개별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기다란 송곳니를 가진 고라니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야생동물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로드킬이나 농작물 피해, 도심가 난입 같은 키워드와 함께 뉴스 단신으로 보던 존재가 아니라 야생에서 신비롭게 살아가는 동물임을 몇 장의 사진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에세이·사진집에는 고라니 50마리의 초상 사진이 담겨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사진 작업을 진행한 시간 동안 경험한 이야기와 고라니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고라니의 현실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지금 이 땅에서 고라니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다채롭게 조망한다.


작가에 따르면 매년 6만여 마리의 고라니가 로드킬로 죽는다고 한다. 국내 서식 중인 고라니 개체수가 약 45만 마리라고 하니 결코 적지 않은 수가 도로 위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3배에 달하는 17만여 마리가 총에 맞아 죽는다. 총에 맞아 죽는다고 하면 의아한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고라니는 초식동물이다. 그리고 갈수록 줄어드는 야생 서식지 환경은 고라니가 먹이를 찾아 경작지로 내려올 수밖에 없게 만든다. 농민들은 지자체나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고 정부는 ‘개체수 조절’을 이유로 고라니에게 현상금을 걸어 사냥을 허용한다.


고라니는 과연 농작물에 얼마나 피해를 주는 걸까? 

작가가 환경부와 농림축산식품부의 자료를 분석해 설명한 것에 따르면 2018년도에 고라니 한 마리가 농작물에 입힌 피해액은 만 오천 원 정도이다. 그리고 그런 고라니를 포획한 사냥꾼에게 주어지는 포상금은 고라니 한 마리당 삼만 원이다. 이쯤 되면 유해 야생동물 구제 사업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 고라니는 더 이상 한국 땅에서 살아갈 장소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농사에 피해를 주는 유해 야생동물로 개체수 조절의 대상이 되거나 도로에서 자동차에 치이거나 운 좋게 구조되더라도 완치되어 야생으로 돌아갈 확률은 3분의 1에 불과하다. 그렇게 살아남은 고라니 중 절반 이상이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자동차 사고를 당하거나 사냥꾼들에게 목숨을 잃는다. 결국 고라니의 운명은 어떤 방향으로 가도 죽음에 이르는 듯이 보인다.

처음에는 예쁘고 아름다운 동물의 초상으로 보였던 사진이 글을 읽고 나면 마냥 예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흑백으로 담긴 모습이 어딘지 쓸쓸하고 아련하다. 안타깝기까지 하다. 초창기 초상 사진을 떠올리는 타원형 프레임은 오래된 사진의 느낌을 더한다. 그래서 마치 죽은 이의 앞에 놓인 영정사진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 사진의 고라니 중 아직 살아있는 이는 몇 마리일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고작 스스로 살아갈 만큼만 먹는 야생동물이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계속해서 산을 허물어 도시를 넓히고 도로를 만든다. 야생동물이 살아갈 곳은 점점 더 줄어든다. 나는 아직 고라니를 실제로 보거나 만난 적이 없다. 아마도 고라니를 보게 된다면 로드킬로 다쳐 움직이지 못하게 된 고라니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 같다. 그렇게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다. 고라니가 평생 사람과 만나지 않고 야생에서 무사히 살아가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야생동물의 삶터를 존중해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고라니가 하나하나의 개별성을 가진 존재로 인간과 함께 공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정혜경_『동물, 원』 작가, 케플러49 대표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3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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