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과 나 6 - 안효림
그림책 속 차원의 문을 열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던 그날이 생각납니다. 회색 가림막, 회색 의자, 회색 책상, 온통 회색으로 둘러싸여 딱딱한 자세로 업무를 처리하던 신입 사원의 상처 가득한 마음을 치료해 준 건 그림책이었어요. 평소 예쁜 그림을 모으는 걸 좋아했는데 마침 해외 원서를 판매하는 웹사이트가 눈에 띄었고, 그곳에서 구입한 그림책이 최고의 마음 치료제가 되어준 것입니다. 그 웹사이트가 아직도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있습니다! 무려 20주년 기념 메시지를 달고 운영되고 있네요. 제가 오픈 기념 고객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어른이 되어 그림책을 접한 지 20년이 된 셈입니다. 그림책 주인공들은 제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어요. 항상 바빴던 제게 아주 잠깐의 시간으로도 어마어마한 여행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20년 전, 데이비드 위즈너의 그림풍을 한껏 참고한 그림을 그려 볼로냐 어린이도서전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선정되지 않았지만 선정자 목록을 살펴보며 설레던 그 잠깐이 참 좋았습니다. 그 후로도 그림 그리는 취미는 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회사 생활과 병행하느라 크게 집중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가지는 건 막연한 꿈 같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과감한 선택이 필요한 인생의 전환점이 오게 되었습니다. 출산이죠. 육아를 선택한 저는 아이와 함께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림책도 원 없이 읽고 글도 많이 썼습니다. 아이가 돌이 가까워 올 즈음부터 일주일에 한 번 글을 배우러 다녔거든요. 금전적 소득이 없음에도 제 인생에서 최고로 공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문학하는 분들은 정말 멋있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무해하고 예쁜 사람들이 존재했다니! 누가 어떤 말을 하든 감사한 조언으로 들렸어요. 하지만 차례로 등단하는 글 동무들이 생기자 저만 예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남을까 봐 많이 울었습니다. 그 지난한 시간이 그림책 만들 때 힘이 되어줄 줄은 까맣게 몰랐지요. 덕분에 첫 그림책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도 앉아서 그림만 그리는 바람에 고관절은 조금 망가졌지만요.
제가 좋아하는 아이들의 천진한 몸짓이 우산 위로 떨어지는 파란 빗방울이 되어 첫 책 『너는 누굴까』가 완성되었습니다. 출간 후 놀라운 경험을 했어요. 『너는 누굴까』의 수많은 빗방울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제게 아픔을 주었던, 회색 가림막 반대편 동료들이 떠오른 거예요. 육아 중에 만난 거친 사람들(작고 귀엽고 소중한 아이와 24시간 밀착 육아를 하다 보면 대부분 모든 사람들이 거칠게 느껴진답니다)도 떠올랐습니다. 솔직히 정말 미운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그들 모두 저와 같은 빗방울이었다는 사실이 상기되었고 저 또한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빗방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느끼는 소속감은 대단했어요. 제 고질병인 비련의 여주인공병과 공주병이 『너는 누굴까』를 읽는 동안만큼은 싹 고쳐졌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만든 그림책이 저를 또 치료해 주다니!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죠. 제가 그림책을 완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누굴까』를 읽은 중국 엄마 독자가 제 책에 사인을 받으며 물었습니다.
전기가 짜르르 흘렀습니다.
얼마나 활짝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었는지 모릅니다. 그 웃음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그래서 『너는 누굴까』에 사인을 할 때는 꼭 “너는 누굴까? 나는 누굴까?”라는 글을 덧붙입니다. 반짝이기 위해 존재하는 어둠 속에서, 마음상처에 『너는 누굴까』 연고를 바를 독자들을 생각하면 제 마음 한구석이 뜨끈해집니다.
첫 책 출간으로 20년 전 따라쟁이 그림을 보냈던 볼로냐에서 예상치 못한 상을 받았습니다. 그 힘을 빌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책을 출간하고 있어요. 모두 제게는 꽤 잘 듣는 마음 치료제입니다. 어떤 상처에 좋은지 늘어놓아 볼게요.
『감나무가 부르면』은 추억이 사무치게 그리워 아픈 상처, 『파도가 온다』는 거친 파도에 맞서느라 아픈 상처, 『개구리 우산이 물었어』는 쓸모없어질까 두려워 아픈 상처, 『인연』은 관계 맺고 끊기로 인한 상처, 『바람이 따듯해』는 영원한 친구를 찾느라 아픈 상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는 말 때문에 아픈 상처, 헉헉, 참 많이도 다쳤네요. 이런 상처들에 읽어주면 좋아요. 가장 빠른 마음 치료제, 그림책으로 제가 그러했듯 독자분들의 마음에도 새살이 솔솔 돋기를 바랍니다.
안효림_그림책작가, 『바람이 따듯해』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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