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는 그림책작가의 세계
세르주 블로크는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인 알자스주의 콜마르에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 장식예술학교에서 공부했어요. 그는 대도시, 특히 파리와 뉴욕을 유난히 좋아해요. 사람들 만나는 걸 즐기는 매우 사교적인 성향인 탓도 있지만, 유럽 풍자만화협회의 회원이자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에 삽화를 싣는 그로서는 온갖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대도시야말로 영감의 원천 아닐까요?
그는 선이나 붓질의 대가들, 이를테면 파울 클레나 장 자크 상페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기다립니다…』의 드로잉은 상페의 『꼬마 니콜라』처럼 선이 단순하고 재치와 유머가 넘치며 따스하고 감동적이에요. 장면마다 빨간 실을 넣어 인생의 통과의례를 아름답게 표현한 이 책은 판형 자체로 주제를 나타내지요. 세로가 가로보다 긴 여느 책과 달리 가로가 세로보다 두 배 이상 길거든요.
가로가 긴 책을 펴면 첫 장면 “나는 기다립니다. 어서 키가 크기를”에서 빨간 실을 오른쪽 끝까지 낑낑거리며 잡아당기는 아이가 보여요. 작가는 얼른 키가 크고 싶은 마음을 아이의 표정에 응축했고, 빨간 실을 왼쪽 페이지에서 오른쪽 페이지까지 길게 늘임으로써 기다림이라는 주제를 빼어나게 표현하지요. 아이가 소년으로 성장하고 청년, 장년, 노년으로 이어지며 겪는 가족 간의 사랑, 군 복무, 연애, 결혼, 출산, 갈등, 질병, 배우자의 사망, 외로움 등 인생의 흐름에서 빨간 실은 선물이나 목도리, 이별의 손수건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중에서도 부상 병동에 누워있는 부상병의 링거 줄, 산모와 아기를 이어주는 탯줄, 부부간의 뒤엉킨 갈등, 안부 전화를 기다리는 장면의 전화선은 안타깝고도 뭉클한 느낌을 자아내요.
우리가 살면서 소망하며 기다리는 시간은 돌이켜보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순간들이지요. 마지막 장면은 빨간 실로 표현한 인생의 순간순간이 기다림으로 이어지며, 끝이란 없고 이어짐 즉 흐름만 있다는 게 선명하게 드러나지요. 한글 번역은 ‘끝’에서 ‘ㅌ’을 지우고 ‘ㄴ’을 써서 ‘끈’으로 나와있는데, 이 부분이 참 아름다워서 원문은 무엇일까 찾아보니 ‘fim(end)’에서 ‘m’을 지우고 ‘o’를 써서 ‘fio(thread)’라고 되어있네요. 글을 쓴 다비드 칼리는 스위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인인데, ‘fi’로 시작되는 알맞은 두 단어를 포르투갈어에서 찾아냈으니 그 노고가 놀랍군요.
두 작가의 협업은 계속 이어져 두 번째 책인 『적』을 만들었어요. 블로크는 앞표지에 온갖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활짝 웃으며 경례받는 장군을 배치해요. 그의 몸집이 엄청나게 뚱뚱하고 (군인이 뚱뚱하다는 게 말이 되나요? 무슨 의미를 담은 거죠?) 경례를 받는 그의 손에는 피가 묻어있어요. (과연 누구의 피일까요?) 그런데 책등에 나온 병사는 비쩍 마른 모습에 꽃을 입에 물고 있어요. 손에 피를 묻힌 장군과 입에 꽃을 문 병사의 대비로 과연 누가 평화의 적인지 짐작할 수 있어요.
앞 면지와 마지막 면지의 그림도 대비됩니다. 언뜻 보면 똑같은 병사들이 똑같이 빼곡히 서있는 것 같지만, 왼쪽 페이지에 꽃을 입에 문 병사 하나가 보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면지에는 그 병사와 오른쪽의 병사 하나가 보이지 않아요. 왜 이렇게 끝났는지를 알려면 내용을 봐야겠지요?
첫 장을 펼치면 새까만 화면에 하얀 글자로 “전쟁이다”라는 글이 나오는군요. 신문은 하얀 종이에 새까만 글자인데 까만 바탕에 하얀 글자는 평시와 180도 뒤바뀐 상황임을 암시하지요. 또한 여느 책들은 면지 다음에 속표제지가 나오는데, 이 책은 신문(또는 호외)과 참호 그림을 지나야 빨간색 바탕 속표제지와 책 정보지가 나와요. 암울한 검은색과 핏빛 빨간색은 전쟁의 색깔이지요.
본문에서 병사는 홀로 참호 속에서 상대방을 적으로 여기며 늘 긴장하고 있어요. 전투 지침서에서 배운 대로 적은 동정심을 모르는 살인마 야수이고, 그의 잘못으로 전쟁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지요. 어쩌면 전쟁이 끝났는데 자기만 모르고 있을지도 모를 참호 안에서, 병사는 가녀린 초승달과 작고 하얀 별들이 흩뿌려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지요.
작가는 비 오는 날 참호 안에서 흠뻑 젖어있는 비쩍 마른 병사를 왼쪽에, 핏빛 와인을 즐기는 새빨간 훈장을 잔뜩 단 명령권자들을 오른쪽에 배치해서 강렬한 대비를 이뤄내요. 병사들의 피로 만든 듯 새빨간 훈장들, 욕심으로 잔뜩 부푼 뚱뚱한 몸, 저마다 핏빛 와인 잔을 든 팔은 마치 짐승의 꼬리처럼 표현되어있어요. 그들의 명령으로 전쟁의 앞자리에 포진된 두 병사는 마침내 상대방을 죽이려고 몰래 서로의 참호 속에 숨어들지만, 발견한 것은 똑같이 적을 비난하는 새빨간 전투 지침서와 가족사진뿐이에요. 이들은 서로가 살인마가 아니라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마도 이 싸움을 끝내자는) 메시지를 플라스틱병에 넣어 총알과 폭탄 대신 서로에게 던지지요. 작가가 마지막 면지에서 사라지게 한 병사 둘은 바로 이들이겠지요.
블로크는 그 외에도 2007년 볼로냐 라가치상을 받은 『세상을 뒤흔든 31인의 바보들』 등 많은 책에 그림을 그렸어요. 아이디어를 탐구하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게 좋지만 프로젝트가 끝날 때가 특히 좋다는 그의 말처럼, ‘특히’ 좋은 일이 자주 생겨서 우리가 그의 새 그림책을 자주 보게 되면 무척 좋겠지요.
서남희_번역가,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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