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상상력의 소유자

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 경혜원

by 행복한독서

지난 11월 초에 작가는 샤르자국제도서전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아랍에미리트의 샤르자에서 열리는 중동 지역 최대 도서전인 이 행사는 올해 42회째를 맞아 한국을 주빈국으로 초대하였다. 한국관에서의 주제는 ‘무한한 상상력(Unlimited Imagination)’이었다. 함께 참여한 다른 작가들도 그렇지만 경혜원 작가 역시 이 주제에 걸맞은 작품의 소유자다.

그림3-경혜원작가.jpg ⓒ경혜원

그의 가장 최근작인 『나와 티라노와 크리스마스』부터 『엘리베이터』 『특별한 친구들』 『알 속으로 돌아가!』 『내가 더 커!』 『공룡 엑스레이』까지 모두 공룡과 함께였다. 왜 이토록이나 공룡에 진심이었을까? 그가 그리고 쓴 그림책들은 단순히 어린이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게 된 초등학교 1~2학년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읽었다. 어른 책까지 거침없이 읽어내던 그에게 자기 검열이란 없었다. 훨씬 더 어렸을 적에 당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그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주인공 모습을 그려 가면서 책을 읽어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한 경험이었다. 점차 관심은 넓어졌다. 위인전을 읽으면서도 각각 다른 인물을 비슷하게 그린 작가가 궁금해서 비교 확인해 보는 것도 이 무렵이었다. 집안 사정상 수없이 옮겨 다닌 이사에도 1980년대 후반에 나온 용진위인전기문학관 책을 어머니는 딱 한 권 보관해서 그에게 남겨주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점점 그림이 좋아지고 그리고 싶은 마음에 입시 미술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는 직업으로서 그림쟁이는 장래에 살아가기 힘들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 몰래 화실에 나갔지만 잠시뿐이었다. 결국 대학은 영문과를 택하였다. 취업에서 모든 곳을 갈 수도 있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오는 곳에서 학교 친구들 모두 일찌감치 제 갈 길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특히 어학연수를 많이 선택하던 분위기에서 그는 휴학을 했다.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 되든 그리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광고 일러스트 학원을 알아보다가 별도의 일러스트 과정을 가르쳐 주는 곳에서 한동안 교습을 받았다. 그러나 따라 그리기가 일상이었던 수업보다 좀더 적성에 맞는 곳이 동화 일러스트를 교육하는 쪽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출판 일러스트레이션은 자연스럽게 어린이책에 삽화를 그리는 일로 서서히 옮겨갔다.

그림3-경혜원작업실.jpg

2004년부터 출판사에서 의뢰받은 일들은 꾸준히 늘어나서 다른 무엇에 한눈팔 사이도 없이 일에 파묻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런 바쁜 틈에도 어머니는 마치지 못한 학교를 꼭 끝맺어 주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해냈다. 계속 일을 하면서 복학도 하고 졸업하고 일은 일대로 단행본, 역사책, 옛이야기 등 요청이 오면 모두 그려서 보냈다. 그만큼 힘들었지만 일이 좋아서 푹 빠져있었다. 어느덧 어린 시절 그가 보고 자랐던 책 속 독자에서 이제는 어른이 되어 자신이 어린이들에게 그리고 보여주는 위치로 바뀌어 있었다. 비록 어른들이 바라는 길은 아니었지만 어느결에 이렇게 일한 대가로 어려웠던 집안에 맏이로서의 역할도 일부 해내고 있었다.

그럴 즈음에 갑자기 어떤 우연처럼 일이 끊기는 시기가 왔다. 어느 날부터 닥친 그 텅 빈 시간에 친구가 그림책 워크숍 참여를 제안했다. 거의 처음 들어보는 그림책 워크숍이 생소하고 낯설었다. 절박하기도 했지만 주저없이 이 길을 택했다. 이미 수많은 그림책에 글작가와 번역자로 활동해 온 분들과 함께하는 작업은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있었다.


이전까지 그림책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그가 1년가량을 여기에 전념했다. 옛이야기, 내러티브, 시 그림책, 창작 그림책 과정을 거쳐 마지막 과정인 더미북을 완성해 나갔다. 이 더미북을 3년가량 더 숙성시켜 첫 책 『특별한 친구들』로 출간했다. 2014년 일이었다. 여기에 오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진로를 과감하게 바꾸어야 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최대한 가까운 거리로 가야만 해서 한참을 돌아갔다. 그림도 따로 배운 바가 없어서 오로지 자신만의 독특한 작법으로 그려냈다. 그림책의 화면은 어쩌면 그의 상상의 세계를 펼치는 공간이었다. 학교와 놀이터, 학원, 아파트를 오가며 살아가는 지금 아이들의 현실 생활을 그림과 이야기로 보여 들려주고 싶은데 여기에 함께하는 친구가 공룡이다.

그림3-공룡.jpg

이 공룡을 표현하는 기법도 처음 『특별한 친구들』부터 『커다란 비밀 친구』 『나와 티라노와 크리스마스』에 이르기까지 점차 다른 방식으로 변화한다. 작업의 바탕을 이루는 기법은 한지에 채색 후 다른 화면으로 옮겨 전체 구도를 맞추는 방식이어서 모든 장면이 종이에 스며든 분채 도료의 채색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받는다. 특히 『커다란 비밀 친구』와 『나와 티라노와 크리스마스』는 손으로 만지면 마치 한지에 닿는 듯한 촉감, 부드러운 색채가 종이에 스며든 것처럼 그림이 푹신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림책을 가슴에 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실제로 『커다란 비밀 친구』 장면처럼 그의 병원 방문은 병상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집안 어른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다. 계속 그의 곁을 지키고 등장시키는 공룡은 중생대 쥐라기 시대 1억 6000만 년 동안 지구상에서 생존했다가 이 생태계에서 패자처럼 사라졌지만 작가는 그들을 다시 알에서부터 살려내는 상상을 한다. 공룡을 깊이 있게 진단하는 정보 그림책 『공룡 엑스레이』를 비롯해 이미 8종의 공룡 등장 그림책은 작가에게 단순한 호기심 충족이 아닌 더 깊은 이유를 제각각 품고 있다. 그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눈뜨고 깨달아 가면서 작품들도 변한다. 그림책 속 숨겨진 의미는 오직 보는 사람들의 몫이고 행운일 뿐이다. 나도 크리스마스 날 책 속 아이가 부럽기도 하고 슬프다. 그의 상상과 그림이 계속 기다려진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이야기』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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