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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여정, 작고 소중한 시간들

by 행복한독서

자코미누스 : 달과 철학을 사랑한 토끼

레베카 도트르메르 글·그림 / 이경혜 옮김 / 56쪽 / 24,000원 / 다섯수레



『자코미누스』는 삶의 작고 소중한 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책은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 자라면서 시기마다 거쳐야 하는 일들과 그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 살아가면서 쌓이는 경험들, 그리고 노년의 삶과 죽음을 보여줍니다. 평범함 속의 특별함,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 그리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자코미누스의 인생 여정을 담담한 문장과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으로 이야기하지요.


표지를 보면 담쟁이가 수 놓인 초록빛 담장 아래 살짝 올이 풀린 짙은 초록색 니트 조끼를 입은 토끼가 있습니다. 신비로운 초록빛 담장 앞에서 무표정하게 서있는 동그랗고 반짝이는 깊은 눈, 쫑긋 세운 귀, 꼭 다문 작은 입, 고요하게 숨 쉬는 분홍 코, 짧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가 바로 이 그림책의 주인공 ‘자코미누스’입니다.

표지를 넘기면 기존의 그림책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형식의 면지 그림이 있습니다. 앞쪽 면지에는 자코미누스의 어린 시절을 함께한 등장인물 34명이, 뒤쪽 면지에는 아버지가 된 장년의 자코미누스와 그 시절을 함께한 등장인물 25명이 일상의 한 장면으로 그려져 있어요. 연필로 세세히 그려진 등장인물들과 그 위에 붙어있는 번호는 책 아래 주석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어떠한 관계인지 보여줍니다. 그와 같은 시기를 살아가는 이들을 보여줌으로써 자코미누스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삶의 여정을 더욱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지요.


자코미누스로 불리는 이 아이는 갱스보루 토끼 집안의 막냇손자로 태어납니다. 자코미누스가 태어났을 때, 베아트릭스 할머니는 아주 기뻐하며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멋진 이름을 이 순한 아기에게 지어주죠. 자코미누스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며 단단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날, 어린 자코미누스는 상상 속의 달나라로 여행을 떠났다가 그만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게 되고, 평생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게 되죠. 그래서 자코미누스는 별로 크지도, 아주 빠르지도, 높이 뛰어오르지도 못했어요. 그렇지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은 배울 수 있었답니다. 베아트릭스 할머니에게 영어를 배웠고, 재미난 것들을 찾아내면 그만큼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그는 철학의 힘과 달을 여행한 힘으로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 세상을 알려준 많은 언어들을 배웠어요.

청년기의 자코미누스는 친구들과 거대한 배에 올라타고 함께 전쟁에도 참전했어요. 그땐 세상이 미쳐있었고, 그런 미친 세상을 받아들여야 했죠. 그는 삶이란 종종 심술궂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성인이 된 자코미누스는 어딘가에 닿는 법을,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법을 기다리며 드디어 사랑하는 이와 가족을 이루고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어요. 그는 이제 치열한 삶의 열차에 올라타고 평범한 일상을 되풀이하며 살아가야 했어요. 모든 것이 삐걱거리고, 모든 게 짜증스럽고 견디기 힘든 시간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본래의 훌륭한 모습을 되찾아갔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때가 그에게 찾아왔어요. 자코미누스는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노인이 되었어요. 그리고 어느 봄날, 아몬드 나무 아래에서 그는 자신의 삶에게 고백하지요.


“나의 소박한 삶이여, 나는 너를 많이 사랑했단다. 너는 나를 떨어뜨려 다리를 절게 하고 힘든 시간을 주었지만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했어. 그리고 나의 늙음이여, 너도 알고 있니? 너는 정말로 겪어 볼 가치가 있다는 걸!”


책의 마지막 장에는 ‘자코미누스 갱스보루의 풍요로운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 목록에는 즐거운 시간도 있지만 슬프고 힘들었을 시간도 많아요. 자코미누스의 평범했던 날들, 그 위에 쌓여온 그의 시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더해져서 자코미누스의 완결된 삶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 책은 한 번만 보고 덮을 수 없을 겁니다. 매력적인 색감과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 대담한 화면 구성이 어우러진 이 멋진 그림책은 모든 장면이 액자에 걸어두고 싶을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워서 보고 또 보고 싶게 하지요. 게다가 각자의 이름을 가진 수십 명의 등장인물이 책 속에 살고 있어 단번에 주인공을 찾아낼 수도 없고요. 그래서 감상의 시작이 자코미누스를 찾는 숨은그림찾기가 될 수 있어요. 커다란 그림 속 작은 자코미누스를 찾아내며 이야기를 따라가기도 하고, 클로즈업된 자코미누스를 만나기도 하고, 빛바랜 스냅 사진으로 그의 생각과 경험을 들여다보기도 할 거예요. 그렇게 이 책은 자코미누스의 삶을 거창하지도, 사소하지도 않게 보여주며 우리의 삶과 겹쳐 보이게 합니다.


이 책을 쓰고 그린 레베카 도트르메르는 ‘작가의 인사’에서 자코미누스의 시간을 상상하며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며 이 책을 천천히 들여다보길 독자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많은 것들이 보일 거라고요. 어느 시기를 살아가든 자코미누스의 삶을 통해서 자신과 만나게 될 거라고요.


오현아_어른그림책연구모임 활동가, 『풋감으로 쓴 시』 저자, 『어른 그림책 여행』 공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3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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