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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May 22. 2024

삶을 투영한 그림책 작업

그림책과 나 - 나현정

얼마 전 책장에서 숀 탠 작가의 『빨간 나무』를 꺼내 보았습니다. 때 묻고 빛바랜 책이 마치 내 얼굴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젊은 날의 찬란함은 잃었지만, 읽어낼 텍스트가 더 많아진 얼굴. 낡은 책 표지를 곰곰 살펴보니, 전에 없던 주름을 발견하듯 예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보였습니다. 종이배를 탄 오렌지색 머리의 인물, 예전에는 그저 우울해 보였던 그가 무언가를 성찰하는 모습으로 느껴졌습니다. 숀 탠이 그린 그림은 변함없으니, 그동안 내가 변한 거겠죠. 시간이 흐르면 책을 읽는 마음도 성장하나 봅니다. 문득 책의 나이가 궁금해져서 판권지를 확인하니 2004년 2쇄 발행, 벌써 스무 살. 단지 햇수가 오래되어서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때를 기점으로 그림책을 알게 된 것이라서 의미심장했습니다. 햇살이 좋은 어느 오후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금 저는 그림책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나현정

이 책이 더 고마운 것은, 나의 빨간 나무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 멋모르고 창작의 길로 들어선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는 늘 작가의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낙서로 빼곡한 교과서와 달력, 동화와 시를 적은 원고지와 타자기 잉크가 선명하게 찍힌 백지들. 나는 작가가 될 거라고, 아니 작가라고 생각하며 온갖 종이를 어지럽히던 시절.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어린 시절의 나는 희미해지고, 어느덧 이십 대에 이르자 하고 싶은 것을 망각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림책이 다정하게 손길을 내밀어, 내 안에 잠들어있던 어린이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빨간 나무』 이후 안 에르보, 존 버닝햄, 사노 요코, 이수지 작가 등의 작품을 보면서, 어렸을 때처럼 이야기와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찬란한 작품들에 눈이 부시고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림책을 만들려면 우선 내 그림 언어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의지를 불태우며 드로잉북을 매일 채웠습니다. 재료나 기법을 잘 몰라서 서툴렀지만, 실수와 우연 속에서 시를 발견하고 이미지들을 연상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아무리 서툰 드로잉이라도, 솔직한 나 자신이 담겨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렇게 작업을 한 지 15년, 지루할 틈 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제각각 흩어진 그림들을 어떻게 이야기로 엮어야 할지 몰라 막막했습니다.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래서 더 어려웠습니다. 문학작품들을 많이 접해서 그런 것인지, 글이란 내가 범접하지 못할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수년이 지나도록 더미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틈틈이 글을 쓰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잊지 않았습니다. 에세이와 일기, 시를 쓰다 보면 엉성했던 생각이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어 뿌듯했습니다. 나의 글을 세상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미술 작업을 하는 친구들과 에세이를 써서 책을 냈습니다. 그리고 간간이 독립출판을 하거나 개인전을 하면서 살다 보니, 작업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작업에 둘러싸여 보내던 어느 겨울, 막 완성한 그림 한 장을 놓고 그림책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검열 없이 즉흥적으로 짤막한 글을 썼는데, 그것이 『너의 정원』의 초고였습니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면서 그 원고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리저리 부딪히고 넘어지느라 바빴습니다. 그러는 중에 창작의 지침 비슷한 것이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야기는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한다는 것. 책상에 앉아 장면 하나, 대사 한 줄을 찾아 헤매다 보니 『봄의 초대』 『하루살이가 만난 내일』 『비밀』이 차례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비밀』을 함께 만든 길벗어린이 송지현 편집장님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작가님이 만든 책들은 삶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네 권의 책이 그린 네 개의 삶. 곰곰 생각해 보니 맞는 말입니다. 만남과 이별, 관계, 죽음은 우리의 삶이니까요. 떠나간 존재를 기억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 소원해진 관계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초대의 마음을 품은 사람. 내일을 만나고 싶어서 하루를 열심히 사는 사람, 언젠가는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는 사람. 내가 그린 존재들이 우리들의 삶을 투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책을 만들기 위해, 저는 작품 속 인물들이 되어보려는 마음으로 작업을 합니다. 

ⓒ길벗어린이(『비밀』)

『비밀』을 만들 때는 코끼리와 코요테의 처지와 감정, 생각에 이입하기 위해 칩거하다시피 하면서 대사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스스로를 대변하면서도 작품 전체의 맥락에서 의미 있는 언어이기를 바랐습니다. 이를 테면 코끼리가 코요테를 ‘불길하다’고 말하는 불쾌한 감정의 표면 너머, 코요테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자 했습니다. 불길함이 꼭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길한 예감이 없다면,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코요테는 불청객이 아니라 죽음을 알려주는 존재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점점 코끼리와 코요테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편집부와 최종 원고를 점검하는 동안에도,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의심과 반문을 거듭했습니다.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함께해 준 편집자에게 감사합니다. 초고를 보고 깊이 공감해 주던 순간부터 인쇄하는 그날까지,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서 숨은 의미를 읽어주고 미세한 색의 뉘앙스를 구현하려고 애써준 덕분에 바라던 책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결국 책은 완성되었지만 이야기가 완결된 것은 아닙니다. 『비밀』에서 코요테가 “세상에 끝이라는 건 없어”라고 말하듯, 독자들이 새롭게 느끼고 해석할 때마다 이야기는 비밀스럽게 생명을 이어나가겠지요. 책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이어져있음을 생각하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씁니다. 


나현정_그림책작가, 『비밀 : 코끼리와 코요테』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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