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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May 20. 2024

120년 진보초가 뿜어내는 거대한 문화

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

박순주 지음 / 370쪽 / 28,000원 / 정은문고


얼마 전에 읽었던 일본 소설 쇼지 유키야의 『도쿄밴드왜건』이 떠올랐다. 도쿄의 어느 전철역 뒷골목에 자리 잡은 90여 년을 이어온 헌책방 ‘도쿄밴드왜건’에서 4대가 어울려 사는 이야기였다. 생활공간과 헌책방이 함께 있어서 마치 가족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 헌책방에 드나드는 손님들과 가족들 사이에 책을 둘러싸고 사계절로 나뉘어 일어나는 여러 사건은 읽는 당시에는 헌책방 배경의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했었다. 지금 다시 이 소설을 들춰보니 말 그대로 ‘오블라디 오블라다’ 철학이 깃든 이야기였다.


『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를 읽으며 든 생각은 ‘진보초’라는 헌책방 또는 책방 거리가 일본의 거의 모두를 보여주는 축소판이라는 것이다. 세계 여러 곳에 책마을이 있지만 진보초처럼 140년이 넘는 곳부터 최근에 만들어지는 곳까지 한데 어우러져 자리를 지키는 곳은 없다. ‘도쿄밴드왜건’처럼 창업한 지 백여 년 되는 곳이 즐비하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을 보면 두 번 놀라게 된다. 첫 번째는 이렇게 많은 서점들이 거의 모두 다른 분야의 책들을 갖추어 놓고 때로는 경쟁하며 한편으로는 협업하면서 오랜 시간 존속해 왔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또 하나는 이 책은 저자의 끈기와 애착에서 오는 노고의 산물이다. 130여 곳의 고서점을 낱낱이 돌아다니며 그중에서 18곳을 찾아 그들이 지금까지 일구어온 서점의 역사를 들으며 이 거리의 흔적을 꿰어놓은 일이다. 스즈란 거리, 야스쿠니 거리, 하쿠산 거리, 사쿠라 거리에 있는 서점과 특색 있는 상점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파리의 아케이드 거리 ‘PASSAGE’에서 이름을 딴 셰어형 서점 ‘파사주 바이 올 리뷰스’는 31개의 각각 다른 이름의 서가가 월 임대료를 내고 헌책을 진열하고 있다. 한 곳의 서점에 31개의 작은 서점이 들어와 있는 셈이다. 


130여 년 전인 1890년에 2층 목조 건물에서 시작해 지금의 6층짜리 건물 전 층을 사용하는 ‘도쿄도서점’, 이른바 ‘콩책’이라고 부르는 초소형의 책만을 파는 ‘로코서방’, 노점상으로 시작해 자연계의 모든 책을 수집해 진열하는 ‘도리우미서방’. 여기에는 동식물과 관련된 고서와 수많은 분야의 도감, 식물, 동물화 등에 이르기까지 건물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또 하나의 특별한 곳이 있는데 일본에서 거의 유일한 존재인 어린이 고서점 ‘미와서방’이다. 근현대 일본의 어린이책부터 전문 연구자를 위한 희귀본 자료까지 갖추고 넓은 독자층을 불러 모은다. 여기를 오가던 고객과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는 이들 중에 동화작가와 삽화가가 여럿 탄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진보초를 단순하게 책방들이 모여있는 관광지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상식일 수 있다. 이 책의 해설에 글을 쓴 작가 이시바시 다케후미는 출판사 직원 시절 회고에서 신간을 주문받기 위해 서점을 방문했을 때를 아직까지 기억한다. 진보초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대부분 매장에 있는 책들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출판사 쪽이 공부가 부족하면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내가 경험한 진보초의 서점들이 거의 그런 모습이었다. 고서와 중고책들이지만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은 책들이 서점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책들을 닦고 한 권 한 권 살피며 서가에 넣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진보초는 알고 가면 무척 편리하고 유용하지만 모르고 가면 시간과 체력이 감당할 수 없는 곳이다. 이 책은 그 모두를 위해 저자의 힘든 노력이 배어있는 체험 결과물이어서 더욱 깊이를 느낀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이야기』 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4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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