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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Jul 25. 2024

그래픽노블이란 장르의 힘

오리들

케이트 비턴 지음 / 김희진 옮김 / 436쪽 / 29,800원 / 김영사



그래픽노블을 읽다 보면 가끔 장르적 성격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문학이 아닌 그래픽노블로 창작된 이유나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래픽노블과 영상의 차이는 뭘까. 그래픽노블은 종이 매체와 영상 매체의 중간 단계인가. 이러한 매체적 성격은 오늘날 문화예술에서 어떤 가치를 지닐까. 왜 그래픽노블이어야 하는가.


『오리들』은 그래픽노블의 장르적 의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책이다. 작품 자체로 의미를 증명한다.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캐나다 동부 해안 노바스코샤주 케이프브레턴에서 살아온 작가의 과거에서부터 시작한다. 2005년 당시 작가는 스물한 살이고 대학을 갓 졸업했다. 이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 장밋빛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텐데 학자금 대출 상환이 발목을 잡는다. 케이프브레턴은 수산물, 석탄, 강철을 수출하던 지역이었지만 기후변화와 산업의 몰락으로 일자리가 없다. 결국 케이트는 머나먼 서부 앨버타주의 석유 공장에 취직해 대출을 상환한 후 원하는 직업을 찾기로 결심한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 공구 담당 직원으로 고용된 케이트는 노동자들이 찾는 공구를 내주고, 돌려받고, 관리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 자체가 아니라 노동환경이었다. 거대한 공장의 작업 캠프는 외부와 단절되고 철저히 폐쇄된 공간이었고 케이트는 성희롱과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고립된 공간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성희롱뿐만 아니라 코카인 복용 등 온갖 문제를 일으킨다. 자전적 이야기이므로 이 책에는 케이트와 함께 작업한 여러 노동자가 등장하고 이들 인간 군상의 일화가 낱낱이 고발된다. 여느 문학작품이라면 수많은 인물과 일화를 전체 서사의 흐름에 맞추어 서술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래픽노블이어서 가능했다.


케이트는 하루빨리 학자금 대출에서 자유로워지겠다는 목표 하나로 지옥 같은 노동환경을 견딘다. 그럼에도 노동자 개인을 악마화하거나 공장이 자리한 지역사회를 매도하는 데서 나아가 노동환경의 비인간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가족이나 사회 등 다른 공동체와 완벽히 분리된 채 임금노동이 전부인 생활 속에서는 그 누구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해버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없다고 여긴다. 노동환경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생각이다.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 대한 시선은 석유 산업 전반으로까지 확장된다. 석유 개발 현장에서 떼죽음을 당하는 오리는 대체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비인간화된 자본주의의 노동자들 역시 떼죽음을 당한 오리들과 다를 바 없다. 기후위기로 어업이 몰락하자 동부 해안에서 서부 공장으로 밀려온 노동자들, 고립된 노동환경에서 점차 상실해 가는 도덕성과 인간성, 수시로 발생하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는 인명 사고, 작업 환경이 원인이라고 예상되는 각종 질병들…. 그럼에도 이 책은 밤하늘 오로라의 신비로움을 잊지 않고 담아내며 자본과 노동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가리킨다. 캐나다 동부 해안가의 쇠락한 도시에서 떠나온 케이트의 이야기가 드넓은 밤하늘까지 나아간 건 그래픽노블이란 장르의 힘이다.


김유진_아동문학평론가, 『구체적인 어린이』 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4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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