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가면의 밤
안경미 글·그림 / 40쪽 / 17,000원 / 위즈덤하우스
편집자와 첫 만남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공교롭게 우리는 ‘투명 가면’이라고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이후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끔 같은 질문을 합니다. 다르고 또 비슷한 대답을 듣다 보면, 왠지 조금 더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듭니다. 드러내고 싶어서, 또 감추고 싶어서, 우리는 조금씩 가면을 쓰고 살아가나 봅니다.
우리 고전 설화에 ‘가면소수’라는 괴물이 있습니다. 버섯처럼 생겼으며 버섯의 갓 부분이 나무로 만든 가면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가면의 밤』은 바로 이 가면소수에서 출발했습니다.
어느 날 편집자에게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가면소수 모티브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그림책을 같이 만들어보고 싶다고요. 이때 가면소수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순식간에 매혹되었습니다. 눈앞에 한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빽빽한 나무 사이 빈터에 가면소수가 군집을 이루고 있고, 달빛 아래 그림자 하나가 숲에 들어서면, 가면소수들은 반짝이는 눈알을 굴립니다. 우리 고전에 이렇게 흥미로운 캐릭터가 있다는 게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아마 편집자도 같은 마음이었겠지요. 홀린 듯 작업하겠다고 답을 하고 나니, 문득 내가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이런 작업 방식은 처음이었거든요.
막연한 마음으로 가면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역시나 수많은 역사와 상징과 이야기들이 있었고 혼란은 깊어졌습니다. 예술에서 너무 많이 다루어진 소재라 무슨 가치를 더할 수 있을까 고민도 되었어요. 그래서 단순하게 ‘가면소수 때문에 일어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아이는 어떤 가면을 쓰고 싶었을까?’라는 질문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가면의 밤』에서 주인공은 보름밤에만 가면을 피우는 가면소수의 숲을 발견합니다. 가면소수 숲에서 모범생 가면, 사나운 가면, 사랑스러운 가면 등 여러 가면을 쓰고 벗습니다. 원래의 얼굴이 희미해져 가며 주인공은 혼란을 겪지만, 결국 자신을 인정해 나가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인정하게 됩니다. ‘자신을 되찾는다’라든가 ‘자신을 발견한다’라는 말 대신 ‘자신을 인정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건 가끔 얼굴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더라도 너무 당황하거나 슬퍼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때로는 얼굴을 놓아 주어야 새로운 얼굴, 혹은 미처 몰랐던 얼굴을 만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가면의 밤』에는 주인공 외에 중요한 인물로 ‘갓 쓴 사람’이 있습니다. 피리를 불며 나타나 주인공을 가면소수의 숲으로 인도합니다. 가면소수가 우리의 고전 괴물인 만큼 고전적 요소를 조금씩 넣고 싶었고, 그래서 이 인물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습니다. 어릴 때 정말 좋아하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습니다. ‘어린이들에게만 들리는 피리 소리’라는 것도 설렜고, 어린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점이 무서우면서 좋았습니다. 피리 소리를 따라간 아이들이 어떤 세계에서 얼마나 재미있게 살고 있을까 매일 다르게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갓 쓴 사람의 얼굴은 그리지 않았습니다(달걀귀신처럼 무섭게 비워둔 것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그림자나 각도 같은 여러 가지 장치를 썼습니다. 갓 쓴 사람이 독자들에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독자들의 상상에 의해 얼굴이 채워지길 바랐습니다. 이야기를 지을 때 위기와 절정의 산이 충분히 높지 않아 고민이 많았는데, 갓 쓴 사람이 제 몫을 해주었습니다.
대사는 없지만 가면소수도 중요한 등장인물입니다. 가면소수가 얼마나 매력적이냐에 따라 몰입도가 달라질 거라 생각했어요. 작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상한 버섯 얼굴을 잔뜩 그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가면의 밤』을 끝내고 나니 이제 한동안 버섯은 안 그려도 될 것 같습니다. 개성 있는 버섯 얼굴 하나하나가 독자들에게 보는 즐거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각적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스케치 단계에서 특히 신경을 쓴 부분은 보름달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욕망과 혼란이 커질수록 보름달은 점점 커집니다. 흑백 바탕에 달만 노랗게 채색을 하니 긴장이 더 강해졌습니다. 달은 하나밖에 없고,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는 데다, 때에 따라 변하기까지 하니 나 자신을 주시하듯 계속 주시하게 됩니다. 조그만 변화에도 반응하게 됩니다. 저는 달을 주시하던 아이의 시선이 결국에는 바깥으로 확장되기를 바랐습니다. 아이가 자신을 수용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면 했습니다.
『가면의 밤』을 지으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가면이나 가면 벗은 얼굴보다, 가면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합니다. 어쩌면 그게 우리의 얼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면이 있다면, 어떤 가면을 쓰고 싶으신가요?
안경미 작가는 『책장 너머 돼지 삼 형제』 『문 앞에서』 『가면의 밤』을 쓰고 그렸으며, 동화 『돌 씹어 먹는 아이』 『우주의 속삭임』 들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를 비롯해 다수의 국제적인 일러스트상을 받았습니다. 『가면의 밤』으로 샤르자 어린이독서축제 일러스트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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