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토끼
고정순 글·그림 / 52쪽 / 16,800원 / 반달
여기에 어떤 토끼가 있다. 이 친구는 미세하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것들을 곁으로 데리고 와 낡고 고장난 부분을 고쳐준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토끼. 낡고 망가진 것들뿐만 아니라 조금만 싫증 나도 버리고 새로 살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와 동떨어진 우주 어딘가의 어떤 토끼.
어느 날, 상냥하고 친구도 많고 멋진, 멋진 토끼가 어떤 토끼의 세계로 들어온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부는 바람처럼 소리 없이 마음에 불어오는 것일까. 멋진 토끼가 할머니의 유품을 고치러 온 그 순간부터였을까. 우연한 만남이 계속되던 어느 날부터였을까. 비 오는 날 잎사귀 우산을 슬쩍 씌워주는 멋진 토끼의 다정함 때문이었을까. 언제인지도 모르게 멋진 토끼의 행동이 따스해 좋았을까.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에 너무도 많은 이유가 있다는 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결혼한 지 9년 차, 그런 사랑의 두근거림은 좀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듯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두근거림에 설레고 아파하던 게 언제였더라. 사랑은 하고 있을 때보다 하기 직전이 더 가슴 벅차고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뭐 지금이 행복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조금씩 마주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어떤 토끼는 멋진 토끼 생각만으로 자신의 세계를 채워버린다.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다른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결국 고백을 해버리고 마는데….
침을 꼴깍 넘기며 대답을 기다리는 가슴 졸이는 시간. 그림책의 여백을 지나가며 느끼는 긴장감과 무척 길게 느껴지는 침묵의 시간을 어떤 토끼와 함께 기다린다. 두근두근. 멋진 토끼는 뭐라고 말했을까? 그날 이후 어떤 토끼는 어떻게 되었을까?
“삐” 끊길 듯 말 듯 아주 작게 소리 내는 미세한 우주선의 구조 요청 소리를 듣고 어떤 토끼는 다시 힘을 낸다. 반려 복어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만의 세상으로 돌아가서 멋진 토끼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가끔 만나는 ‘친구라도 좋아’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부디 다시는 볼 수 없는 불상사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상대방에 대해 속속들이 알기 전까지 더 두근거리고 더 마음 졸이며 상대방도 나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바라는 완전한 사랑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소리를 내며 살아가고 있을까. 사랑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미숙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와 주파수가 맞는 상대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랑에 빠져 본 토끼만 알 수 있는 그 떨리고 긴장되는 마음. 여기에 사랑을 아는 어떤 토끼가 있다. 우리 마음에 어떤 토끼 한 마리가 살고 있다면 그 토끼가 멋진 토끼를 만나 더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고 쓰러져 가는 것들의 소리를 듣고 새롭게 고쳐줄 수 있는 어떤 토끼. 사랑도 고쳐쓸 줄 아는 어떤 토끼. 너의 세상을 응원할게.
김미화_이랑 책방 대표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4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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