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이 길어도, 아이스크림
니나 블리세르트 글·그림 / 이호은 옮김 / 36쪽 / 17,000원 / 도도
이것은 편견일지 모른다. 스투레는 소심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보인다. 사실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할 때 벌써 걱정스럽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따라 조금씩 움직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의외로 이 친구는 소심한 것과는 달랐다. 다른 이를 보살피고 배려하는 게 몸에 밴 친구다. 당연히 양보도 자연스럽다.
노부부 지팡이가 자기에게 걸려 자칫 그분들이 넘어질까 봐 거리를 둔다. 뒤집힌 채 버둥거리는 무당벌레를 못 본 척하지 않는다.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신발 끈 묶으려다 자기 발등 위를 지나는 개미를 떨궈버리지도 못한다. 떼쓰는 아기와 아기를 달래는 부모에게도 자리를 내어준다. 학생들이 끼어들어도 그냥 봐준다. 그러니 줄에서 계속 밀려난다.
줄 끝으로 밀려나며 스투레가 기다려야 할 시간은 더 길어졌다. 목이 탄다. 줄을 벗어나 물을 마실 수밖에 없다. 다시 줄을 서지만 이번엔 물을 마셔서인지 화장실에 가고 싶다. 점점 묘하게 서스펜스가 느껴진다. 독자는 이런 스투레의 행동에서 당연히 슬픈 결말을 예감하게 된다. 그래도 줄은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스투레 앞에 두 사람만 남는다. 하지만 노래 가사처럼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투레 차례가 오자 아이스크림 가게는 오늘 장사는 끝이라며 문을 닫는다. 서럽고 황망하고 억울한 스투레와는 무관하게도 완판을 기뻐하는 주인장 얼굴은 환하다.
독자는 안타까운 마음에 불만과 의혹이 섞여 터져 나온다.
왜 저 광장에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한 군데뿐인가? 이건 답이 금방 나온다. 맛집이겠지. 왜 차례를 무시하고 끼어드는 학생들을 질책하는 사람이 없을까? 자기 아기를 달래느라 다른 사람 자리를 빼앗게 되는 건 왜 인식하지 못하지?
책 밖 독자가 화를 내보았자 스투레를 구해줄 순 없다. 아, 천만다행이다.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 라쎄가 유난히 축 처진 어깨를 한 스투레를 보게 된다. 라쎄는 기계 안에 남은 아이스크림을 모두 모아 이제껏 다른 이들이 사 먹은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스투레에게 만들어준다. 행복한 건 스투레만이 아니다.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그 장소엔 라쎄와 스투레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전 장면도 마찬가지다. 찌꺼기처럼 남은 재료와 사람들이 흘린 조금의 아이스크림을 개미와 무당벌레와 청설모와 새들이 먹고 있다. 아이스크림 맛을 알고 있다면 스투레와 주변 작은 친구들에게 감정 이입되는 건 당연하다. 그들은 줄을 설 필요도 없이 주어진 걸 자연스레 함께 나눠 먹고 있었다.
다수가 나름의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되는 이면에는 돌보고 지키고 옳은 방향을 가리키느라 제 몫을 포기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기억되지 않는다. 스투레보다 먼저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행복하게 떠난 이들이 스투레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스투레는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며 지키는 색, 초록 옷을 입었다.
김혜진_그림책보다연구소 대표, 『야금야금 그림책 잘 읽는 법』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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