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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Aug 28. 2024

이기훈 앞에 징검돌 놓기

한국 그림책작가의 세계 - 이기훈

이기훈은 33만 명의 SNS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이다. 팔로워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이래도 되는 건지….” 

작가는 마치 자기가 잘못이라도 한 양 안절부절못한다. 그림도 그렇거니와 큰 키에 또렷한 눈매, 흔치 않은 콧수염 때문에 카리스마 강한 예술가로 여겼는데, 막상 마주하니 덩치만 큰 아이, 아무 계산하지 않고 아무 눈치 보지 않은 채 순정하게 자신을 보여주는 아이가 눈앞에 앉아있다. 그저 미소가 지어진다. 


그는 시작부터 국제적이었다. 첫 그림책 『양철곰』으로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중 두 명에게만 주는 ‘2010 멘션’을 받았다. BIB에서는 어린이심사위원상을 받았고, CJ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도 선정되었다. 가장 최근작 『09:47』은 롯데출판문화대상을 수상했고 중국 천보추이 국제어린이문학상 추천 도서에 들어갔다. 인류의 환경 파괴로 인한 지구의 재앙, 어린이와 (인공)동물 사이의 교감, 그들 덕분에 놓지 않을 수 있는 희망의 끈. 이런 모티프들에 평자와 독자 들은 엄지를 세워주었다. 비극적이고 종말론적인 『빅 피쉬』, 어린이의 마음속 깊은 욕망과 현실의 충돌을 그리는 『알』도 그만큼 상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못지않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비룡소(『빅 피쉬』)

이기훈의 책은 글 없는 그림책의 한 전범이 될 만하다. 글은 없으나 서사는 강력하다. 확실한 캐릭터들이 있고, 그들의 세계관은 넓고 탄탄하며, 행동은 동기와 결과가 분명하다. 지구의 멸망이든 아이의 욕망이든 흡인력 있는 이야기에 실려 때로는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게 하고, 때로는 머물러 있게 만든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물음이 무색하게, 다양하게 나온단다. 

“그냥 낙서하듯 놀면서 이것저것 그려요. 그러다 보면 그 자체에 에너지가 응축된 그림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걸 잡는 거예요.” 

그렇게 양철곰 그림이 한 장 나왔다. 이질적이면서도 사연 있어 보이는 캐릭터가 나온 것 같았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술술 풀렸다. 『빅 피쉬』는 텔레비전에서 원시 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 영감을 받았다. 『알』은 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만들려고 고심하던 끝에 나온 이야기고, 『09:47』에서는 작심하고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고 싶었다. 

“글을 안 쓰지는 않습니다. 일단 적어 놓은 뒤 최대한 그림 안에 내용을 다 담아낼 수 있도록 다시 그리고 다시 그리고 하면서 지워나가요.” 

그림 솜씨가 별로 없다고 극구 겸손하면서도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실력은 이런 노력에서 나온 셈이다. 


최근 이기훈은 그림책작가로서도 그렇지만 라이브 페인터로서도 맹렬하게 활동 중이다. 말 그대로 현장에서 그림 그리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제언과 도움을 받아들여 덤벼든 분야였다. 처음에는 두 달 걸릴 일을 어떻게 두 시간 만에 해내라는 말인가 싶어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재미있을 것 같았다(그는 재미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혹은 하는 일 모두에서 재미를 찾아낸다). 이번에도 비결은 무수한 노력이었다. 드로잉 연습을 숱하게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스케치 없이도 그리고 싶은 그림이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2022년 부산이 시작이었다. 


그 이후 그의 그림과 라이브 페인팅은 전 세계로 뻗어갔다. 시드니에서는 그림책 원화를 전시했고 예테보리, 볼로냐의 도서전에서 라이브 페인팅을 시연했다. 신들린 듯 휘둘러지는 붓 아래서 순식간에 드러나는 환상 가득한 광경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리하여 33만 명의 팔로워가 세계에서 모여든 것이다. 최근에는 코펜하겐과 마이애미의 세계적 갤러리에서 열리는 단체 전시회에 그의 그림이 포함되었다. 8월에는 파리올림픽 기념 한국 문화 행사에 초대되어 에펠탑 앞 전시장에서 라이브 페인팅을 선보일 참이다.

그림책과 회화 사이를 뛰어다니는 작가. 그는 이렇게 광폭의 행보를 보여준다. 이유가 있는 행보다. 

“그림책 안의 그림은 서사에 묶인다는 한계가 있어요. 그냥 그리는 그림에는 자율성이 있고요. 자유롭게 그리다 보면 뭔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이 나와서 신기해요. 그게 이야기를 형성하기도 하지요.” 

한 장의 그림에서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그는 ‘묶임’에 몰두하고, 그런 다음 다시 자유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을 그는 ‘놀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제대로 놀기 위해서 뼈저린 노력을 기울인다. 그 노력을 작가가 강조하지는 않지만, 독자에게 먹먹하게 전달되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해서 그가 만든 그림책은 종말적인 무너짐과 다시 일어섬 사이를 넘나든다. 『양철곰』에서도 『빅 피쉬』에서도 『09:47』에서도 그랬다. 『알』은 종말적 재앙은 아니지만(난장판이 된 집 안은 적어도 엄마에게는 종말적 재앙이겠지만), 유년의 한 시기와의 결별과 새로운 시작이 들어있다. 


그림책과 회화 사이를, 한계와 자율성 사이를, 놀이와 노력 사이를, 파국과 재생 사이를 넘나드는 작가. 스트레스가 엄청날 것 같지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얼굴이다. 

“제가 계획하거나 준비한 건 하나도 없었어요. 그냥 길이 저절로 생긴 것 같았어요. 주위 사람들이 징검다리 돌 놓듯이 계속 뭔가를 놓아줘서 따라갔을 뿐이에요.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토록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이니 남들 눈에 보이지 않았을 길이 보이고, 남들 앞에 놓이지 않았을 징검돌도 놓였을 터이다. 


이 작가에게는 내가 원하는 바를 마음껏 꺼내 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 몰두하는 가면놀이 연작에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졸라도 될 것 같다. 사실은 그 즉흥 그림도 모두 『양철곰』과 『빅 피쉬』의 재해석이라니, 양철곰 2와 빅 피쉬 2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앞에 또 다른 징검돌이 놓이는 셈이다. 


김서정_작가, 평론가, 『판타지 동화를 읽습니다』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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