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나는 돌이에요
지우 글·그림 / 60쪽 / 18,000원 / 문학동네
맑은 개울에서 돌 하나를 주웠습니다. 작고 반들반들한 돌에는 각양각색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무늬는 어떻게 생긴 걸까? 혹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무늬로 기록된 걸까? 우리에게는 시간이 어떻게 남을까?’
기억력이 좋지 않아 지난 일들을 잘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리면 그 시간이 내게 더는 없는 건 아닐까, 어떻게 하면 시간을 조금 더 잡아 둘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어느 날 ‘시간 기록자’인 돌을 만났습니다. 모래가 쌓여 돌이 만들어지는 데는 약 천만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발끝에 차이는 돌들 중에 어느 하나 저보다 짧은 생을 산 돌은 없습니다. 제가 개울에서 주웠던 그 돌의 생에 저도 기록되었을까요? 짧은 생을 만난 모든 존재의 존엄한 시간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어 『나는 돌이에요』를 쓰고 그렸습니다.
『나는 돌이에요』는 백만 살 된 작은 돌이 서로 다른 생을 살아가는 존재들과 시간을 공유하고, 때론 침잠하고 온몸으로 부딪치며 매일을 기록하는 이야기입니다. 콩이 무럭무럭 자라고 새가 알을 깨고 날아가는 동안 돌은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날에도, 역경 가운데 있어도 돌은 유일무이한 해와 자신을 견주어보며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돌은 또한 나비의 작은 떨림, 눈의 고요함, 콩이 꼬부라져 제 생명을 낳는 것을 느낍니다. 말도 없고 다리도 없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써 내려갑니다. 어떤 때에는 부딪혀 떨어지고, 닳아 없어지기도 하겠지만 그저 그 순간을 열심히 살아냅니다.
시간이 쌓여 돌의 무늬가 되고, 그것이 다시 돌 전체를 이루는 것처럼 『나는 돌이에요』의 작업 역시 이야기 구상부터 출간까지 거의 4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전 작업인 『때』 『나는 한때』와 그림 스타일이 언뜻 달라 보이지만, 저의 탐구 지점은 늘 같습니다. 그리는 도구 본연의 물성을 활용하여 표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둡니다. 이번에는 여러 질감의 종이 위에 구아슈, 연필, 판화 등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제가 생각하는 디지털의 본질인 도트, 직선, 픽셀과 같은 기본 그래픽을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돌이에요』를 만들며 가장 중점적으로 고민한 것은 ‘어떻게 하면 돌에게 쌓인 시간의 기록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돌은 각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제 몸에 무늬를 만들어 기록합니다. 앞 페이지의 돌은 다음 페이지의 돌과 같지만 다른 돌입니다. 판화의 평면적인 느낌과 복제의 특성을 활용해 여러 장의 판화를 중첩하여 돌의 연속성을 표현하고, 그 위에 디지털 작업으로 시간을 효과적으로 덧붙였습니다. 또 장면 장면의 모든 요소 중 한 호흡으로 그려진 것은 없습니다. 마치 직선처럼 보이는 빗줄기도 작은 원들이 모여 만들어졌고, 고여있는 물웅덩이 역시 가는 선이 쌓이고 쌓여 물결과 파동을 이룹니다. 새와 강아지, 잠자리, 소금쟁이도 부분과 부분을 조합해 전체를 표현하는 콜라주로 작업했습니다.
작업하며 가장 힘들었던 건 보이지 않는 돌의 시간을 보이도록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돌의 찰나, 하루, 며칠, 한 계절과 같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시간 개념부터, 돌이 침잠해 들어가는 지층 속에서의 몇천, 몇만 년이라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시간으로의 확실한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돌의 오랜 침묵의 무게와 물아의 상태를 닮은 검정을 선택했고, 큰 분할에서 작은 분할로 억겁의 시간을 나누어가며 역동하는 돌의 시간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한 권에 돌의 긴 역사를 담기 위해 지각변동, 지구, 광물, 돌의 종류 등 다양한 자료들을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연대기별로 나누어 돌의 연표를 만들었습니다. 고요를 깨뜨리는 변화를 생각했습니다. 큰 역사부터 개개인의 미시적인 이야기까지, 돌이 지나왔을 수많은 시간의 이미지를 그려보았습니다. 돌처럼 때론 가만히 때론 온몸으로 부딪쳤습니다.
이 책이 출간되기 직전에 이사한 작업실을 청소하다 전 집주인 할머니의 장독대를 지켰을 법한 납작한 돌을 만났습니다. 할머니의 시간을 함께한 누름돌은 장독을 닮은 붉은 무늬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할머니는 그분의 생을 완성하신 것 같습니다. 그 돌은 이제 제 책상에 자리 잡았습니다. 저는 종종 ‘내 시간은 이 돌에 어떤 무늬로 남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 돌을 바라봅니다.
백만 년을 산 돌의 이야기를 만나 주시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가끔 저는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오늘을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돌이 하는 말은 제가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온몸으로 기록하는 돌처럼 우리, 함께 천만년을 살듯 오늘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우 작가는 홍익대 판화과를 졸업했으며 쓰고 그린 책으로 『유치원엔 네가 가!』 『때』 『나는 한때』가 있습니다.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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