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한때를 기억하는 ‘머리카락’이 응원하는 이야기
나는 한때 새싹이었고 껌과 친구가 되기도 했고 망아지였다가 커튼이기도 했어.
때로는 시작하는 이를 응원했고 걸음이 같은 이를 만나기도 했어.
한때 나는 여러 가지 이름이었어.
나는 한때
지우 글·그림 / 56쪽 / 17,000원 / 반달
저는 머리숱이 많고 자연 갈색으로 남들의 부러움을 샀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의 어떤 한때에는 샤워 부스 물줄기가 검은 물줄기로 변할 만큼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어요. 나는 견딜 수 없어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렸어요. 그때는 머리카락의 변화도 충격이었지만 시간도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지요. 어떤 때는 너무 생생하고 어떤 날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어요.
시간은 참 이상했어요. 시간을 알려주는 시곗바늘은 메트로놈 박자처럼 정확하게 움직이니 시간도 그렇게 지난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절 나의 시간은 너무도 다르게 느껴졌어요. 4분의 4박자가 어떤 때에는 8분의 6박자, 2분의 2박자, 4분의 3박자로 바뀌고 심지어 규칙도 없어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지요. 오로지 나는 유한한 존재라는 걸 절실히 깨닫는 시간이었지요.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고 지금은 몇 해째 노랑머리로 살고 있어요.
머리를 질끈 묶어 모자를 쓴 사람, 희끗희끗한 새치, 유독 머리만 까맣게 보이는 비슷비슷한 모양의 파마머리 할머니들, 바람에 사라락 날리는 긴 머리 아가씨, 무엇이 쑥스러운지 빨갛게 된 귓불이 잘 보이는 짧은 상고머리 학생 등.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의 머리 모양은 저마다 달랐어요. 저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지금 보내고 있는 ‘한때’를 무엇이라고 할까, 또 오늘을 추억한다면 ‘한때 나는 무엇이라고 할까?’ 하며 궁금했어요. 여러 모양의 머리카락을 보니 떠오른 장면들이 있었어요. 유독 머리가 하늘로 붓처럼 삐죽이 솟아난 첫째 아이의 머리카락을 보며 웃던 때, 매일 까치집을 짓는 아이의 머리카락에 붙어있던 껌을 보고 당황한 순간, 나도 그랬고 내 딸도 그랬던 “나를 쳐다보지 마”의 커튼 앞머리로 보낸 사춘기의 한때, 처음 해보는 파마머리가 어색했던 때, 가발을 쓰고 내가 아닌 척해보았던 때, 기억을 더듬을수록 이런저런 ‘한때’들이 차곡차곡 쌓였어요.
우리의 일생을 함께하고 때때마다 다른 모습을 가지는 머리카락의 한때는 악보의 마디처럼 기억나는 “인생의 한때”였지요. 그런 한때를 『나는 한때』에 담았어요. 여전히 시간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머리카락의 한때를 기록하고 추억하는 것으로 시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나는 한때』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 아니에요. 각각의 ‘머리카락’이 주인공이지요.
습성 재료로 그린 머리카락은 가락가락을 표현하기 힘들었고 화면을 꽉 채울 땐 무겁고 무서웠어요. 건성 재료로 그린 머리카락은 선의 중첩과 나열, 강약을 주자 내가 원했던 머리카락의 조형을 그릴 수 있었어요. 특히 장년의 아저씨는 적합한 표현을 찾기까지 여러 장의 드로잉을 거쳤지요. 아저씨의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은 웃기지만 가장 율동감 있게 표현되어야 하고, 몇 가닥 없지만 힘있게 표현해서 꿋꿋이 살아낸 삶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머리카락의 한때를 모아 나열해보니 우리의 인생이 보이는 이야기가 되었어요. 처음 아이디어를 스케치할 때 제목은 ‘한때 나는’이었어요. 머리카락의 일생이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일생처럼 느껴졌지요. 시간 순서대로 추억한다면 ‘한때 나는’이 제목으로 더 적합했겠지만, 다양한 우리들의 ‘한때의 머리카락’에 집중해 인물을 기록하고 앞으로 살아갈 우리를 이야기한다면 ‘나는 한때’가 더 좋았지요.
『나는 한때』는 독특한 책 꼴과 결말을 가지고 있어요. 이 책은 겉싸개를 독자가 찢어야 비로소 선명한 제목이 드러나지요. 원래 더미에서 생의 어느 한순간 머리를 싹둑 잘라 본 경험을 표현한 표지로 잡아보았는데, 저의 의도와 출판사 의견이 잘 맞아 겉싸개를 찢을 수 있도록 만들게 되었어요. 겉싸개에 칼 선을 넣어 머리카락을 자르는 느낌을 종이의 물성으로 표현할 수 있었지요. 이렇듯 『나는 한때』는 머리카락을 자르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책날개에 그려진 가위를 찾아보세요).
“한때 나는 여러 가지 이름이었어” 하고 끝나는 결말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머리카락이 말하는 우리 모두의 한때이기 때문에 일부러 비워두었어요. 독자가 자신의 한때를 생각하며 머리카락을 콜라주로 붙이고 “나는 한때 ㅇㅇ일 것이다” “나는 한때 ㅇㅇ다”로 이야기를 만들어주기를 바라서요. 이 책은 독자가 각자의 한때를 기록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랍니다.
시작은 제가 했지만 마지막 작가는 독자들이에요. 여러분들이 겉싸개를 찢는 한때에 이 이야기가 시작되고, 책을 읽는 동안 우리의 한때는 계속 진행 중이며, 여러분의 머리카락의 한때가 콜라주로 붙여지는 그때를 기다립니다. 독자분들이 각자의 한때를 채워가고 기록하고 추억하기를 응원합니다.
지우 작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그림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때』 『유치원엔 네가 가!』, 그린 책으로는 『고양이는 알고 있어』 『전설의 보물 지도』 『튀김이 떡볶이에 빠진 날』 『못 말리는 맹미주』 등이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