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토록 생생하고 뭉클하고 재미있는 벼농사 이야기라니!

by 행복한독서

꽃이 밥이 되다

김혜형 지음 / 216쪽 / 18,000원 / 목수책방



어떤 것을 많이 좋아하면 적정한 거리를 두기가 어렵다. 나에게 이 책이 그렇다. 책에 푹 빠져있는데 서평이 가능할까?


『꽃이 밥이 되다』라는 책 제목은 얼핏 보면 어떤 비유나 은유처럼 느껴진다. 제목 아래 달린 부제 “논물에 서서 기록한 쌀밥의 서사”를 보고 나서야 제목이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사실 자체임을 알게 된다. 벼꽃이 쌀밥이 되어온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 책은 온라인 시민언론 ‘민들레’에 연재된 ‘김혜형 농사만감’ 원고들을 모은 것이다. 책으로 엮이면서 더 풍성해졌다.


그런데 벼농사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될까? 이 책은 술술 읽힌다. 햅쌀로 갓 지은 밥처럼 글이 맛있다. 함께 실린 사진도 좋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옮겨 사는 귀농 초기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지고, ‘진짜 시골’로 옮겨 정착한 뒤 운명처럼 주업으로 짓게 된 벼농사 이야기는 ‘분투기’에 걸맞은 내용들로 뜨겁다. 몸을 써서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이야기이니 낭만과는 거리가 먼데도 책을 읽어가다 보면 생동하는 밝은 기운에 휩싸인다. 일의 고단함과 막막함을 전할 때조차 그렇다. 왜 그럴까. 온몸으로 쓴 것이 틀림없을 다정하고 묵직한 기록이 벼농사 여정을 따라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을 관통한다. 글이 생생하니 읽는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 같다. ‘살아 있는 생명체’ 아기 볍씨가 눈 뜨는 대목에서는 글쎄, 내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게 아닌가. 곁에 실린 사진 속 ‘하얀 젖니 같은 촉을 쏙쏙 내미는’ 아기 볍씨들 모습에 홀딱 빠져 어쩔 줄 몰라 하고….

동네1-발아한 볍씨.png 파종하기 좋을 만큼 발아한 볍씨

마음 가는 대로 따르다 보니 농약을 쓰지 않고 유기농 친환경 농사를 짓게 되었고 그 논에서는 온갖 생명들이 어울려 살게 된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논에만 사는 풍년새우며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긴꼬리투구새우에 약 치는 논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거머리까지. 논에서 자연사한 긴꼬리투구새우를 보며 작가는

“태어나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며 생명의 역사는 이어진다. 과거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잠깐 여기 있다. 물에 떠서 분해되는 저 긴꼬리투구새우에게도 논물의 찰랑거림을 느낀 순간이 있었겠지. 한 마리 긴꼬리투구새우가 한 생애를 의탁했던 논이 우리 논이어서 기쁘다”

고 고백한다. 옆 사람 ‘의득 형’도 공감한다. 의득 형은 습기 많은 날이나 아침 시간에는 예초기를 돌리지 않는데 그 이유가, 축축한 자리를 좋아하는 두꺼비를 다치게 할까 두려워서다. 아니 이 두 사람은 농사를 지으면서 다른 생명 있는 것들의 존재를 조용히 기뻐하고 동등하게 대하며 자신들도 그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리 힘들어도 도시를 떠나 귀농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고,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좋다는 두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사랑하는 마음이 샘솟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동네2-모내기.jpg 모내기하는 도중 이앙기에 모판을 채워 넣고 있다 / 빗속에서 김매기를 하다

이 책에는 귀농하여 농사짓느라 고군분투하는 두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돕는 이웃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낌없는 우애가 따뜻하다. 도정하는 날 동네 정미소의 잔칫집 같은 풍경은 정겹다. 서로 베풀고 나누는 것이 일상이던 ‘오래된 미래’ 같다. 농사에 직격탄을 날리는 기후위기도 빠질 수 없다. 더운 날이 길어지자 벼멸구의 대폭발로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쓰는 일반 논의 벼들이 마치 거대한 원형탈모처럼 둥그렇게 타들어가며 쓰러지는 기막힌 이야기에 깜짝 놀란다. 함께 실린 사진을 보면 정말 적나라하다. 바로 옆의 유기농이나 친환경 논들은 멀쩡하다는 사실에 더 놀라고 그 기특한 이유에 감동하게 되고.

동네1-벼이삭.jpg 벼 줄기 속에서 이삭이 올라온다. 이를 ‘출수’라 한다 / 벼알의 열린 껍질 사이로 하얀 수술이 고개를 내민다

누가 이 놀라운 책을 읽을까? 막 모를 심은 논처럼 6월 초에 갓 들어선 우리나라 새 정부. 이름도 감동인 ‘국민주권정부’의 수장 이재명 대통령과 농정을 담당하는 일꾼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너무 거창한가? 그렇지 않다. 이 책을 돈 내고 사서 밑줄 그으며 보시라고. 재미있는 대목에선 깔깔 웃고 뭉클한 대목에선 가슴 먹먹해하고. 눈으로도 읽고 내키면 소리 내어 낭독도 하며 ‘쌀밥의 무게’를 한 번 느껴 보시라고. 잘 읽은 뒤엔 제대로 된 벼농사 정책 입안과 실행에 참조하시라고! 농사를 지켜 우리 삶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이 일은 천부당만부당하게도 계속 미뤄져 왔다. 너무 오래 홀대받았다. 그만 미룹시다. 세세손손 우리 쌀을 지킬,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지킬 방법을 입안하고 실천합시다.


오늘도 나는 밥을 먹었다. 나를 살게 하는 이 밥은 어디서 오는가. 살아 숨 쉬는 땅, 논과 밭에서 온다. 더 정확히는 땀 흘리는 농부들에게서 온다. 이번 여름 ‘불볕이 등허리를 지지는 논바닥’에서 그 뻑적지근할 논 김매기 자원봉사를 청해볼까? 세상에 밥 귀한 줄 새삼 깨닫고 싶다. 나부터. 내 몸으로.


유현미_그림책작가, 『발은 땅을 디디고 손은 흙을 어루만지며』 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5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빗방울이 건네는 다정하고 촉촉한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