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선정 글·그림 / 56쪽 / 17,000원 / 길벗어린이
비 오는 날을 좋아하시나요? 맑고 쾌청한 날도 좋지만, 저는 비가 내리는 날에만 느껴지는 습도와 차분한 분위기, 물기 가득한 풍경도 좋아합니다.
이 그림책의 시작은 아주 단순하게 구름 속 물방울들이 너무나 무거워져서 “이제 그만 내려가자!”라고 외치면서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 낙하하는 장면이었어요. 무거워져서 남김없이 모두 내려와 땅을 적시고, 다시 땅속으로 스며들어 갔다가 하늘로 올라가 뭉게뭉게 구름이 되고, 다시 또 내려오고 하는 이런 순환이 비구름들의 여행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계속 돌고 도는 순환의 여행을 하다 보면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친구들도 많지 않을까? 사람들은 잘 모르는 누군가의 슬픔도, 습관이나 취향, 비가 내리는 날의 다채로운 세상 풍경을 잘 알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다정하게 촉촉하게』는 ‘빗방울’의 시점으로 비 오는 날의 세상을 바라보는 설정입니다. 비가 내리면 사실 신발도 젖고 옷도 축축해지며 도로 위의 차는 막히고 뭔가 기운이 더 처지는 것 같아서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분들도 많지요. 하지만 빗방울의 입장에서 조금 달리 들여다보면 이들의 다정한 인사가 들릴 거예요. 누구도 씻겨주지 않는 조약돌들의 묵은 먼지들을 말갛게 씻겨주고 달팽이 집 청소, 여리지만 씩씩하게 자라는 텃밭의 채소에게도 대견하다고 인사하고, 조용히 책을 보는 어린 친구에게는 저번보다 많이 자랐구나 하며 창문으로 톡톡 아는 체하고 비 오는 날에도 여전히 뻥뻥 축구를 하는 친구들에게는 너무 보고 싶었노라고 반가워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산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지나치지 못해요. 내가 힘차게 내려갈 테니 그 빗소리에 기대어 실컷 울어버리라고 아저씨를 위로해 줍니다. 양복이 젖어가는지도 모르고 우산을 깊게 쓴 채로 울고 있는 이 분의 사연은 뭘까요? 울고 싶어도 크게 소리 내서 울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에서 위안을 받길 바라며 그렸던 장면입니다.
한참을 내려가던 빗방울은 이제 여행의 마지막인 땅속으로 스며들어 갑니다. 끝난 줄 알았지만 그곳에서 어쩌면 가장 간절하게 비와 만나기를 기다린 말라가던 작은 씨앗을 만나요. 푸른 싹이 움트고 비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면서 이들의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고민했었던 부분은 주인공인 빗줄기를 정말 다양하게 표현해 내고 싶은 욕심과 정말 다 내 마음에 들게 그릴 수 있을 것인가 그 가운데서 조절을 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림 원화들을 드럼스캔 받은 후에 디지털 작업으로 빗줄기를 그려나갔는데 아주 거칠게도 그려보고 거세게, 투박한 느낌의 비도 그려봤지만 문제는 연필로 그린 원화와 거친 디지털 작업의 빗줄기가 어울리지 않았어요. 너무 거친 비의 이미지로 연필 원화가 그냥 묻혀버리는 느낌이었고 처음에 1에서 20까지의 스펙트럼의 빗줄기를 생각했다면 1에서 8정도의 스펙트럼으로 줄여서 표현했습니다.
그림책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감도 중요한 장르라서 제 욕심을 다 담아낼 수는 없었어요. 선택하고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텍스트의 양도 처음보다는 많이 줄였는데, 그림의 밀도가 높으니 텍스트는 시처럼 짧고 간략하게 가는 게 균형감이 맞겠다는 편집부와 의견이 맞아서 글 작업은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다만 인쇄파일 넘기기 바로 전날까지 어떤 장면의 단어 선택으로 편집자와 의견 교환하고 조율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던 막바지 작업이었어요.
이 글을 쓰는 오늘 아침에 곧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뉴스가 들려왔어요. 일 년 중 가장 많은 비가 내릴 이 계절에 비가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는 시간은 어떨까요? 소곤거리며 내리는 빗소리, 세차게 퍼붓는 소나기, 깊은 밤에 알게 모르게 다녀간 빗방울들. 그 어떤 비라도 좋으니 비 오는 날 이 책을 읽으며 다정하고 촉촉한 비의 여정에 동행해 보기를 바랍니다.
서선정_그림책작가, 『다정하게 촉촉하게』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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