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 삶의 소중한 피난처

철학하는 그림책

by 행복한독서

시계탕

권정민 글·그림 / 56쪽 / 16,800원 / 웅진주니어



우리나라의 첫 기차는 1899년 9월 18일에 개통된 경인선이다.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33킬로미터 구간이었고, 1900년 7월에는 현 서울역인 남대문역까지 42킬로미터 전 구간을 개통했다. 당시 기차를 ‘화륜거’라고 불렀는데 인력거를 타던 양반들이 시간에 맞춰 정확히 출발하는 철도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시간’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 것은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현대사회는 모든 사람이 시간에 따라 움직이고 시계를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스케줄도 촘촘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서류를 접수할 경우 1초만 늦어도 등록이 되지 않아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문 닫는 시간이 되기 전에 상점에 도착해야 물건을 살 수 있고, 학교나 직장에서도 시간을 지켜야 한다. 현대인의 시간 강박증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근대적 제도에 적응한 결과다.


권정민의 『시계탕』은 시간관념이 투철한, 현대인을 대표하는 엄마와 아직 현대인의 시간 세계에 진입하지 않은 어린이를 대비한다. 또한 시간에 예민한 엄마를 바로 ‘시계’가 되어버린 모습으로 그려 직관적으로 상징을 전달한다. 이 책에는 독자에게 잘 알려진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을 오마주한 장면이 등장한다. 시계가 녹아 흘러내리는 모습을 담은 이 초현실주의 그림은 화가의 강박관념과 편집증으로 인해 창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의 주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시계탕』은 시계가 된 엄마를 되돌리기 위한 어린이의 모험담이다. 아이는 부랴부랴 동네의 시계 수리점을 찾아가지만 시계를 고치는 할머니는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라며, 시계탕이라는 알쏭달쏭한 이름만 알려준다. 할머니가 시간에 맞춰 가게 문을 닫는 장면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과 연결하여 보면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한다.


다음 날 어린이는 시계가 된 엄마를 수레에 싣고 시계탕을 향해 떠난다. 낯선 동굴에 들어선 아이는 오싹한 소리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출구를 향해 나아간다. 많은 그림책에서 주인공들은 ‘동굴’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 앤서니 브라운의 『터널』에서도, 백희나의 『연이와 버들 도령』에서도 주인공들은 동굴 너머에 있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전진한다. 용기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고 싶은 순간을 참고, 한 걸음씩 나아갈 때 비로소 태어난다. 시계가 된 엄마를 돌려놓는 과업은 그만큼 쉽지 않은 도전이다.


어린이는 동굴을 지나 깊은 숲속에 당도한다. 그곳의 계곡에 시계탕이 자리 잡고 있다. 시계탕이 있는 공간은 신비의 장소로 표현된다.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이 온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듯 시계들이 탕 속에 담긴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시계가 된 많은 사람들이 탕 속에 있고 전날 만났던 시계를 수리하는 할머니는 캠핑을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린이는 엄마가 시계탕에 들어간 사이 할머니 곁에서 먹고 마시며 쉼을 얻는다.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로 시계탕에서 나온 시계를 고치는 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시간을 관장하는 여신처럼 보인다. 전날 정시에 가게 문을 닫아 엄마를 고칠 수 없었던 장면과 시계탕 계곡에서 시계를 수리하는 장면이 연결된다. 엄마는 일상 공간이 아닌 시계탕 계곡에서 비로소 자신을 찾는다.

동네7-시계탕_본문.png ⓒ권정민, 웅진주니어

여행을 마친 다음 날 엄마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만 분명 시계가 되기 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텍스트 없이 그림만으로 시계에서 나온 부속품과 나사를 보여주는데, 작가의 말을 통해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엄마는 가끔 고장이 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죠. 그땐 나사 몇 개를 풀어 주어야 한답니다.”


우리는 흔히 기계가 고장 나면 나사를 조여주고 일상을 잘 살려면 느슨해진 태엽을 감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는 기계가 되어버린 인간을 회복시키는 방법은 ‘나사를 조이는 것이 아니라 풀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계 고치는 할머니는 태엽이나 나사를 조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풀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에 의지한 채 사는 현대인이 시간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시간에 종속되어 있음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 미치는 시간의 영향력을 깨달을 때 삶의 균형을 찾을 방법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그림책의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뱀은 다양한 신화에서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흐르도록 만들 것인가에 대한 성찰은 바쁜 시간에서 한발 물러설 때 비로소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시계탕은 우리가 일상을 다시 열심히 살기 위해 잠시 머무는 휴게소가 아니다. 주인공이 시계탕을 찾기 어려웠던 이유도 그곳이 시간이 멈춘 공간이며 ‘시간’ 자체를 성찰하는 성소였기 때문이다. 인문학자 도나 해러웨이가 언급한 생태학적 피난처, ‘레퓨지아’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허락된 소중한 시간을 잘 쓰고 있는지 돌아볼 시간이나 장소가 필요하다. 그곳은 깊은 산속의 사찰이 될 수도, 그림책을 읽으며 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저마다 그런 소중한 피난처를 가져야 한다. 여러분의 ‘시계탕’은 어디인가?


오세란_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문학의 세계』 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5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역문화 생태계를 가꾸는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