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 지음 / 356쪽 / 20,800원 / 버터북스
『책의 계절』은 세계 열세 개 도시의 서점과 도서관, 북 페스티벌을 둘러보고 엮은 여행기이다. 책이 나오자 처음부터 출간을 염두에 두고 여행을 한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누군가의 책을 만드는 일이 직업이면서도 정작 내 이야기를 책으로 엮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불과 일 년쯤 전이다.
나에게 여행의 목적은 여행 그 자체에 있다. 있고 싶은 곳에 머물며 온전히 그 시간에 집중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 본업이 작가라면 모를까, 어떻게 집필까지 생각할 수 있겠는가.
책이 내 여행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2013년부터다. 그때 나는 다니던 회사에 한 달의 휴가를 내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여행에 나섰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도착해 보니, 1732년부터 영업 중인 서점이 있다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영업 중인 서점’으로 2011년 기네스북에 등재되기까지 한 베르트랑서점이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무너진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는데, 건물 외벽에 붙은 기네스북 마크가 293년 된 서점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인 포르투의 렐루서점이다. 여러 매체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수차례 선정한 이곳은,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를 집필할 때 영감을 받은 곳으로 알려졌다. 1906년부터 영업을 시작했으니 이 서점도 100년이 족히 넘었다. 지금은 전시장처럼 운영하고 있어 입장권도 예매해야 하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는 건축물 보호를 위해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내부 사진 촬영도 금지했다. 비가 오던 날 아침 9시, 대여섯 명의 관광객과 함께 서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오픈을 준비하는 서점원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책 여행이 거듭되며 낯선 도시와 인사하기에 책만큼 좋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됐고,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야기들이 점차 나에게 책을 쓰라고 종용했다. ‘언제까지 이 귀한 자료를 혼자만 보고, 살아 숨 쉬는 현장의 이야기를 내 보물 상자에만 넣어둘 것인가.’
평소 낯을 가리는 나는 모르는 이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는데, 책의 공간에서라면 상황이 다르다. 책을 앞에 둔 나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용기로 운영자에게 이것저것 묻곤 한다. 강력한 호기심이 낯가림을 이기는 순간이다. 그때마다 현지에서 만난 서점 운영자나 작가는 마치 같은 북클럽의 멤버인 것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일본 사가시 양학당서점의 점주 고미야 씨에게 그와 비슷한 연배인 서점 운영자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네덜란드 레이덴에 있는 클릭스판서점의 운영자로, 그는 손님을 응대하는 틈틈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 와인잔에 따라 둔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그의 허락을 얻어 촬영한 그 사진을 나는 정말 좋아하는데, 내가 이 풍경을 고미야 씨에게 보여주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마친 그는 내 휴대폰의 사진을 확대까지 해가며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고미야 씨의 이런 반응은 다른 나라 서점 운영자의 마음에 깊이 공감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는 내게 판매용이 아닌 개인 소장용 컬렉션을 보여주기도 했다. 프랑스 옥션에서 구입한 스페인 귀족과 프랑스 공주의 결혼 행렬을 그린 화집을 보여줄 땐 목소리에 힘이 실리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런가 하면 아기자기하고 사소해 보이는 것도 그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는 30년 넘게 일본 전역의 서점 로고를 모으고 있다. 거래하는 서점의 책에 붙어있는 서점 로고를 떼어내 스크랩북에 정리하고 커다란 액자에 넣어 전시해 두었다. 겨우 우표 정도 크기의 로고들을 모으기 위해 로고가 인쇄된 종이 뒷면에 물을 묻혀 살살 떼어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땐 그 장면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어쩐지 일본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장면 아닌가?
이처럼 여러 상상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풍경 속에 머물다 보면 어떤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어릴 때 다니던 서점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이 시대에 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의 토양을 이룬 많은 것은 책으로부터 왔다.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는 나의 호흡이다. 좋아하는 책의 페이지가 끝나감이 아쉬워 다음 장 넘기는 것을 잠시 멈출 때, 반짝이는 문장을 발견하면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을 때, 책을 통해 알게 된 장소에 가고자 여행 가방을 꾸릴 때, 그때마다 책을 통해 내게 온 무수히 많은 감정과 생각은 나를 이루는 토양이 되었다.
한곳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서점이나 도서관은 지역민이 자라는 토양이 되고 지역의 아이콘이 되고 시대의 역사가 된다. 그곳을 벗 삼아 성장한 사람들은 다시 그곳의 자부심이 되고 또 누군가의 토양이 된다. 시인 사이토 마리코가 말했듯이, 책은 원래 나무였다. 그 나무가 디딘 흙이 우리에게 와서도 또다시 흙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나무의 이야기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정지현_북디자이너, 『책의 계절』 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5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